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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한가운데

등록일 2023.06.22 17:35 게재일 2023.06.23 유월 한가운데다. 정수리에 내려꽂히는 햇빛이 따갑다. 예전엔, 지금쯤 한창 필 장미꽃은 다 졌다. 늦둥이로 피어난 작은 장미꽃 한 송이가 외로울 뿐이다. 올 유월을 맞으며 든 생각은 바로, ‘자유와 민주’였다. 우리나라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도 안 될 역사가 숨 쉬는 달이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우리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6.25 동족상잔이 벌어진 유월’이다. 하여, 1963년 ‘호국보훈의 달’로 유월이 지정되었을 터다.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달이며, 1987년 6월 항쟁을 품은 달이기도 하다. 자유와 민주를 지켜내기 위해 분연히 목숨 바쳤던 선열들과 함께 가는 공동체 대한민국호 열차가, 유월 한..

장미 아가씨들

등록일 2023.06.08 17:57 게재일 2023.06.09 장미 아가씨들이, 펜스 담장 바깥으로 일제히 고개를 내밀고 웃기 시작했다. 방송국 주물 펜스형 담장이다. 오월 중순이 되자, 해맑은 장미 웃음이 절정이다. 출근 때 보다, 퇴근 때가 장미 웃음이 더 예쁘고 많다. 왠지, 동남쪽으로 더 많이 얼굴을 내밀고 웃기 때문이다. 며칠간은 풋풋한 고운 장미 얼굴에 취해 오갔다. 어느 날 퇴근길에, ‘꼭 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북한 응원단 아가씨들 같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마, 부산 아시안게임 때였지 싶다. 담장 바깥으로 하나같이 얼굴을 내밀고, 활짝 웃는 장미꽃들과 북한 여자응원단의 어디가 닮아 그런 생각이 났을까. 아름다워서? 여럿이 몰려 있어서? 전체 모습이 닮아서? 일사불란해서? 요정처럼..

하얀 사월

(생태수필) 마르첼리노! 이제야 불러보는 네 이름이다. 소식 못 보낸 지 벌써 세 번째 봄이구나. 나는 무에 그리도 무심했을까. 봄꽃들이 앞다투어 찬란하고, 신록이 온 누리에 푸르른데, 뭐가 마음눈을 가렸는지…. 마음 깊은 너는 ‘코로나19’ 탓이라 할 거야. 그러면 좋으련만, 그게 다가 아닌 것만 같구나. 사월 중순이다. 보릿고개 시절, 이곳에서는 이밥을 연상시키는 하얀 꽃을 보며 배고픔을 달랬다지. 그 이팝꽃이 지금 만발했다. 코로나19 역병이 퍼지는 첫해 오월 중순 한 아침, 하얀 신부(新婦)처럼 내게 달려온 이팝꽃이었다. 한데 왜, 삼 년 후엔 거의 한 달을 앞당겨 왔을까. 피는 기간을 따져봐도 이르다. 하얀 조팝꽃도 앞당겨 웃고, 붉은 장미꽃도 앞당겨 피어나니, 하순에는 많은 담장에 장미 웃음 ..

논 사잇길

등록일 2023.05.25 18:06 게재일 2023.05.26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뒤처질세라 엄마 치맛자락 따라 바지런히도 오르던 그 옛날, 논대로골의 다랑논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다랑논 사잇길은, 두 사람이 비켜 가기도 버거운 길이었다. 그게 어제 같은데, 지금은 타향에서 승용차를 몰고 아스팔트 논 사잇길을 가고 있다. 세월은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텃밭 가는 길이다. 2차로 아스팔트 포장 지방도로다. 농사철이면 농기계들이 오가는 길이기도 하다. 걷는다면 반 시간은 걸릴 거리의 도로 양쪽으론 드넓은 논이 펼쳐진다. 길가에 몸 붙여 사는 식물들을 벗하며 텃밭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로수 없는 도로이지만, 이름 모르는 풀들이 열 지어 서서 오가는 이들에게 응원단처럼 환호를 보낸다. 걷거나 자전거로..

다목적 스프레이제

등록일 2023.05.11 20:01 게재일 2023.05.12 더는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다. 나름 거금 들여 산 건데 네댓 해 지났다고 괴상한 소리를 내다니, 품질에 문제가 있다. 한 시간 정도 걷는 출퇴근 동안 어떤 의성어로도 표현 못 할 남모를 소음에 노출되어, 뒤틀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참아왔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어 그런 거야.’ 속 불평이 폭죽처럼 터졌다. 고치려고 여러 궁리를 해 보았다. ‘비 오는 날 시작되어, 비 그치고 며칠 지나면 괜찮아진다. 갈수록 소리는 커지고 시간도 늘어난다. 이런 현상은 틈이 늘어나 그 속에 스며든 물기 때문일 거다.’ 하는 추론과 판단이 들었다. 당장 고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헤어드라이어로 이곳저곳 물 스몄을 자리를 말렸다. 그래도 소리는 그대로다. 아..

놀랍고도 반가운 비(碑)

등록일 2023.04.13 19:30 게재일 2023.04.14 “저게 뭐지?….” 수령이 300년이 넘는다는 강당 앞 고목을 살피고 돌아서다가, 눈에 들어온 커다란 표지석에 나온 혼잣말이다. 정문 안쪽 왼편이다. 가까이 가보았다. 참 놀랍고도 반가웠다. 도무지 예상치 못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문학비 아니면, 기념이나 공적비일 거란 생각은 빗나갔다. 표지석은 바로 ‘국민교육헌장 비’였다. 그것도 지자체나 학교에서 설치한 것이 아니라, 개교 30주년을 맞아 동문 분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었다. 이곳 J 중학교 동문의 깨어있는 마음들이 나를 와락 껴안는 것만 같다. 갑자기 그 옛날, 희망에 가득 찼던 시절로 되돌아간 마음이다.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던 무렵, 나는 그것을 외워야 할 학생 신분은 아니었다..

목련 축제

등록일 2023.03.30 19:10 게재일 2023.03.31 춘분을 사흘 앞둔 토요일 오후. 하늘이 유리알이다. 오랜만에 할아비 집에서 고사리 형제가 만났다. ‘동기(同氣)가 없는 두 아이가 친형제처럼 자라나게 해야 한다’는 내 소망이 작동했나 보다. 동네 공원에 함께 갔다. 예전엔, 아이들이 많이 와 시끌벅적하던 곳이다. 요즈음은 아이들이 드물다. 오늘은 아이라고는 우리 손자 둘 뿐이다. 아동들과 청소년들도 없다. 기구 운동을 하거나, 정자나 벤치에 앉아 쉬는 나이 든 분들만 여남은 돼 보인다. 어딘가 텅 빈 느낌이다. 다섯 살, 세 살 난 우리 집 사촌 형제는 얼마간 미끄럼틀에서 정신없이 놀았다. 이곳저곳을 오르내리며 신이 나서 깔깔댔다. 나와 큰손자 아비는 아이들이 놀다 다칠까 봐 시선을 뗄 수..

돌탑 투시경

숲속 세 갈래 오솔길 옆, 작은 돌탑에 점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한 봄날 돌탑을 자세히 살폈다. 푸석푸석한 돌탑이다. 이 산에 있는 이암(泥巖) 돌멩이들로 쌓아서 그런가 보다. 중앙에 제일 높은 첨탑이 있고, 그 주위에 서너 개의 낮은 보조 첨탑이 있다. 누가 설계하여 세운 것도 아닌데,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 더 간절하고 정겹다. 산을 오르는 많은 사람의 신실한 마음들이, 돌탑으로 탈바꿈하여 가슴에 쌓여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돌탑은 조금씩 커졌다. 어느 날부터 나도, 돌탑을 쌓는 석수(石手)로 변했다. 어울리는 돌을 찾아 더 보기 좋게 쌓는다. 어떤 날은 여러 개의 돌을 쌓고, 어느 날은 뾰족한 돌을 열심히 찾아 조심조심 맨 위에 올려 더 뾰족한 첨탑을 만든다. 돌탑 쌓는 동안 돌 하나에 믿음이..

새마을 깃발

등록일 2023.03.16 19:30 게재일 2023.03.17 언제부턴가 이 집 앞을 지날 땐, 반갑고도 찜찜하다. 출퇴근 때 오가는 이면도로의 한 집 앞이다. 가정주택을 조금 개조하여 경로당으로 쓰고 있다. 본채 외관은 그대로이고, 대문 부분과 길 쪽 담장을 헐고 출입을 편케 한 구조다. 특이한 점은, 대문 헌 좁은 공간에 세운 깃대 셋에 언제나 깃발을 걸어둔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본채 벽에는 ‘모범경로당’이란 팻말이 붙었다. 깃발은 중앙 깃대에 태극기, 앞에서 볼 때 오른편에 새마을기, 왼편에 단체기가 걸려있다. 출퇴근길에 초등학교 앞 두 곳, 중학교 앞 한곳을 지난다. 세 학교 모두 현관 입구 위에 세 개씩의 깃봉이 있다. 오늘 퇴근길에 세 학교가 내 건 깃발을 살폈다. 세 학교 모두 중앙 깃대..

점프 스타팅

등록일 2023.03.02 18:28 게재일 2023.03.03 갑자기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구랍(舊臘) 하순의 일이다. 차량 보험사의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러 시동을 걸었다. 서비스맨의 말에 따라 반 시간 이상 차를 운행, 배터리를 충전하였다. 일주일 후, 또 시동이 걸리지 않아 다시 긴급출동을 불렀다. 그는 또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배터리를 새것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엔진을 공회전시켜 충전했으나 삼사일 뒤부터 시동이 안 걸렸다. 예전에도 이런 경우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새 배터리로 바꾸었었다. 보험 긴급출동 서비스를 더 부를 수 있지만,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마침 집에 다니러 온 둘째의 차에다 시동용 케이블을 연결, 시동을 걸고 또 충전시켰다. 이후부터는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