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 85

무위자연 숙제

(생태수필) 첫 쓰르라미 소리가 녹지에 윤슬처럼 일렁거린 지도 한 주가량 지났다. 작년엔 못 본 귀한 만남이 찾아온 곳이다.  사람에게 해로운 풀이 안 자라고, 찌를 가시나무도 없다. 그러니, 아이들이 큰일나지 않을 녹지다. 작년에는 가지치기와 잦은 벌초로 이곳을 정물화같이 다듬었었다. 어쩌면, 수더분한 이 녹지가 도심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동들 마음에 푸른 생명의 숲으로 자리 잡아, 올곧은 심성을 기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새 교장선생님은 나와는 마음 주파수가 비슷한가보다. 학생들이 놀더라도 다칠 위험이 거의 없는 녹지를 그냥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람이 즐기려고 만든 정원이나 골프장같이 손을 댄 자연보다는, 지구가 빚어내는 자연이 인간과 뭇 생명들이 어우러져 살 수 있는 터전일 테니..

어린 왕자

갑자기 가슴속에서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어린 시절 모내기하던 날의 쓰라린 기억이, 봄바람에 파르르 떠는 참나무잎 노랫가락에 찔려 확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솟아 나는 뜨거운 눈물은 노을빛 타고, 운동용 경사판(傾斜板) 거꾸리에 매달린 내 관자놀이와 이마로 흘러내려 시나브로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든다. 쓰라린 기억은 그 옛날, 참혹했던 우리 집 마당 담 너머로 나를 이끌었다. 혼자 숨어서 펑펑 운다. 담 넘어 외진 곳이다. 막내에게 죄스러워 마당에 나설 수가 없어서다. 나를 그렇게도 따르던 귀여운 놈, 똘똘하여 집안의 어린 왕자 대접을 받던 막내가 꼭 나 때문에 저리된 것 같다. 이윽고, 마당에서 어머니의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단장(斷腸)의 소리다. 통곡의 기도다. “야 대신 날 딜고 가이소! 지발, 날 딜..

하얀 사월

(생태수필) 마르첼리노! 이제야 불러보는 네 이름이다. 소식 못 보낸 지 벌써 세 번째 봄이구나. 나는 무에 그리도 무심했을까. 봄꽃들이 앞다투어 찬란하고, 신록이 온 누리에 푸르른데, 뭐가 마음눈을 가렸는지…. 마음 깊은 너는 ‘코로나19’ 탓이라 할 거야. 그러면 좋으련만, 그게 다가 아닌 것만 같구나. 사월 중순이다. 보릿고개 시절, 이곳에서는 이밥을 연상시키는 하얀 꽃을 보며 배고픔을 달랬다지. 그 이팝꽃이 지금 만발했다. 코로나19 역병이 퍼지는 첫해 오월 중순 한 아침, 하얀 신부(新婦)처럼 내게 달려온 이팝꽃이었다. 한데 왜, 삼 년 후엔 거의 한 달을 앞당겨 왔을까. 피는 기간을 따져봐도 이르다. 하얀 조팝꽃도 앞당겨 웃고, 붉은 장미꽃도 앞당겨 피어나니, 하순에는 많은 담장에 장미 웃음 ..

돌탑 투시경

숲속 세 갈래 오솔길 옆, 작은 돌탑에 점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한 봄날 돌탑을 자세히 살폈다. 푸석푸석한 돌탑이다. 이 산에 있는 이암(泥巖) 돌멩이들로 쌓아서 그런가 보다. 중앙에 제일 높은 첨탑이 있고, 그 주위에 서너 개의 낮은 보조 첨탑이 있다. 누가 설계하여 세운 것도 아닌데,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 더 간절하고 정겹다. 산을 오르는 많은 사람의 신실한 마음들이, 돌탑으로 탈바꿈하여 가슴에 쌓여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돌탑은 조금씩 커졌다. 어느 날부터 나도, 돌탑을 쌓는 석수(石手)로 변했다. 어울리는 돌을 찾아 더 보기 좋게 쌓는다. 어떤 날은 여러 개의 돌을 쌓고, 어느 날은 뾰족한 돌을 열심히 찾아 조심조심 맨 위에 올려 더 뾰족한 첨탑을 만든다. 돌탑 쌓는 동안 돌 하나에 믿음이..

붉은피톨 예지몽

아차! 하는 순간, 왼손 약지가 뜨끔했다. 얼른 장갑을 벗었다. 약지엔 선혈이 낭자하다. 아리기 시작하였다. 무작정 피 솟는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었다. 멍하니 서서, 낫질하던 순간 벌어진 일을 잠시 되돌아보았다. 상처가 쓰라렸다. 어디선가, ‘상처가 더러우면 잘 안 낫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 밑에 물이 흐르는 옆 도랑으로 갔다. 여름 늦은 오후, 산골짜기 도랑의 바위틈으로 내려오는 물은 차고 맑았다. 감아쥔 오른손을 풀고, 왼손을 물속에 넣으며 상처를 보았다. 첫째 마디에서 둘째 마디까지 베었다. 낫 날이 얇은 약지 피부를 파고들어, 뼈가 허옇게 드러나 보였다. 덜컥 겁이 났다. 상처 부위를 대강 씻었다. 멈추던 피가, 씻는 바람에 다시 솟아났다. 물이 차가워 선지 상처가 별로 아프지도..

슴베, 인류문명 열다

2021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강길수 ‘슴베, 인류문명 열다’ 발행일 2021-10-19 17:00:00 사람 마음을 자꾸 낚는다. 무슨 알레고리를 숨겼기에, 삼천 년 나달 동안 시나브로 사람을 부른다. 앞에 선 쑥부쟁이 아가씨도 그 부름 따라온 것일까. 핑크빛 볼 수줍게 피어난 그녀는, 오늘도 캐릭터들 앞에 서서 그리운 임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 마음 안테나를 뽑아 세운다. 그리워 시린 가슴 하나 툭 떨어진다. 앞에 서면 보면서도 모르겠고, 돌아서면 또 보고파지는 캐릭터. 사람을 애태우는 묘한 재주를 팬터마임으로 뽐내는 상(像). 퍼져 나오는 아우라(aura)에, 어떤 메시지가 실렸는지 그 앞에서 마냥 궁구(窮究)케 하는 실존. 무뚝뚝한 모습에 정나미 떨어지다가도, 눈 감으면 또 아련..

박주가리 날틀

박주가리 날틀 강길수|姜吉壽 하늘이 코발트블루다. 작은 날틀 하나가 높하늬바람 타고 하늘에 떴다. 어디로 뭘 하러 가는 걸까. 날틀은 비행기도, 로켓 우주선도, 드론도, 외계인의 비행접시도 아니다. 누에고치섬유 같은 갓털이 주인 하나 달랑 달고 나를 뿐이다. 한 올 한 올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는 갓털이다. 작은 것들도 모이면 큰 힘을 내는 법. 무수한 갓털은 주인을 꽉 부여잡고 바람 타고 나른다. 바람이 세게 불면 한 방향으로 모여 빨리 날고, 약해지면 산발한 여인의 머리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며 지그재그로 곡예를 한다. 그 나르는 모습이 꼭 소문 무성한 외계인 비행접시의 비행을 연상케 한다. 갑자기 날틀이 처박힐 듯 빨리 내려온다. 추락하는가 보다.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떤 날틀인지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