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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 신귀족

등록일 2024.05.13 20:18                       게재일 2024.05.14    동네 공원에 핀 커다란 이팝나무 하얀 꽃이 부드러운 목화송이다. 저 흰 목화를 타서 무명을 짜, 옷과 이불을 짓는다면 이 동네 아이들이 다 입고 덮어도 남겠다.  한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팝꽃이 ‘보릿고개 배고픔을 참아 넘기는 달램의 이밥’이었다니, 우리네가 지난날 겪은 고난의 삶이 고스란히 꽃 안에 스며 있다. 가슴 아리다. 지난 산업화 시기 건설현장, 공장, 실험실, 기획, 관리, 설계, 사무실, 정부 부처 등 온갖 일터에서 불철주야 피땀 흘리며 보릿고개를 물리치던 근로자들. 그들은 이팝꽃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며 오늘을 살까.  70~80년대 산업화 시기 근로자들은 죽기 살기로 일해 나..

4·10 숫자들의 향

등록일 2024.04.22 19:56 게재일 2024.04.23 4.10 총선 전 어느 아침. 옆 아파트 담장 안쪽에서 보랏빛 꽃을 앙증스레 피워내는 한 그루 라일락을 올해도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아니나 다를까. 라일락 향기가 몸과 마음의 온 세포를 윤슬처럼 일렁이게 했다. 나이 들며 후각이 둔해지는 걸 느끼는데, 한 모금 라일락 향기가 내 온갖 감각 센서를 일깨웠다. 사방이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이 라일락 나무는 해마다 그 짙은 보랏빛 꽃과 향기를 피워내며 사람을 기쁘게 한다. 대체 라일락은 어떤 유전자를 가졌기에 저토록 자기 삶에 정직, 진실할까. 식물은 거짓을 모른다. 본능대로 살며 꽃피우고 열매 맺는다. 한데, 자칭 만물의 영장(靈長) 인간은 어떤가. 영적 존재, 윤리, 도..

침묵하는 다수

등록일 2024.04.08 18:17 게재일 2024.04.09 방송국 녹지에 2월 말부터 피어났던 진달래꽃이 가는 3월과 함께 시나브로 졌다. 옹골지고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타고 오는 봄을, 도시 복판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린지가 여덟 해다. 한데, 올해는 꽃이 전 같지 않았다. 어딘가 풀죽은 듯 초라해 보이고, 어떤 침묵이 스민 것만 같았다. 올 이른 봄은, 같은 거리를 오가는데도 뭔가 달라졌다. 작년 3월, 은행나무 밑에서 새봄을 모셔오던 하얀 별꽃도 못 만났다. 흔하던 민들레꽃도 덜 보였다. 봄비 잦은 탓일까. 기온 이상인가. 사회 분위기 때문일까. 아무튼, 내가 본 올 이른 봄은 자연도, 사람도 예전보다 ‘침묵, 침묵하는 다수’로 다가왔다. 하지만, 4월이 오면 온갖 봄꽃 피어나 침묵의 구름을 걷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