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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한 달

등록일 2022.05.15 17:55 게재일 2022.05.16 합창 소리 가득하다. 경내로 내려꽂히는 따가운 5월 초순 한낮 햇살도 가세하여 함께 노래하고 박수갈채를 보낸다. 4월 초순 어느 아침, 이곳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소리가 뒤범벅된 아수라장이었다. 오랜 세월 자란 굵은 팔뚝들이, 아닌 밤중 홍두께로 툭툭 잘려 나가 너부러지며 아우성치는 현장이었다. 팔뚝 잘리는 큰 나무의 통곡도, 막무가내로 자르는 날카로운 기계음도 못 듣는 로봇 일꾼으로 변한 사람들…. 그 폭력의 잔상이 가슴에 남았다. 한 달이 지났다. 기계톱에 맥없이 잘려 떨어지는 팔뚝의 유탄에 맞아 일부 가지가 유명을 달리했던 장미는, 잃은 동기들을 기리려는 듯 더 커다란 붉은 꽃들을 피워냈다. 핑크빛 수줍은 볼로 웃으며 봄 마중하던 진달래..

코로나19 펜스

등록일 2022.05.08 18:06 게재일 2022.05.09 학교 녹지화단에서 영산홍꽃이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하지만, 갈 수 없다. 전 같으면 여러 사람이 정자나 곁 의자에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더러는 운동장을 걷고 있을 시간이다. 무엇이 마음에 걸리고 억누르는 것만 같다. 찝찝한 생각도 가슴을 붙잡는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 후 새로 세운 펜스 때문이다. 펜스는 녹지의 화단이나 정자, 의자 같은 시설물들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부지경계선 위에 무작정 놓아졌다. 그 바람에 녹지의 꽃과 나무, 편의 시설들이 그만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십여 년 전쯤, 전국적인 ‘담장 허물기’ 붐이 일었다. 초등학교는 물론 관공서, 종교시설까지 담장 허물기 사업이 벌어졌다. 국민 쉼터가 부..

무슨 바람

등록일 2022.04.24 18:18 게재일 2022.04.25 경내가 잔인하다. 울부짖음이 가득하다. 어제 퇴근 때는 연록 새 식구 맞는 노랫소리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한데, 오늘 아침엔 아파 우는 소리, 앓는 소리, 겁에 질린 소리가 마음 귀를 따갑게 파고든다. 게다가 커다란 기계음이 몸의 귀청을 마구 때린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소리가 뒤범벅되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일꾼들은 사다리차 작업대에 타고 기계톱 소리 한껏 올려, 몸통에 뻗어 오른 굵은 팔뚝들을 툭툭 잘라낸다. 통곡도 기계음도 못 듣는 로봇 일꾼 같다. 며칠 안에 연록 새 잎새들이 손가락마다 돋아나 생명을 찬양할 텐데, 그 꿈들도 댕강 끊어지고 있다. 잘린 팔뚝들은 바닥에 이리저리 떨어져 너부러진다. 그 서슬에 애꿎은 진달래꽃 가지와 장미..

만남, 20220316

등록일 2022.03.27 18:24 게재일 2022.03.28 2022년 3월 16일 오전 11시 38분. 보도를 걷다가 한 곳에 닿은 눈길에, 가슴 떨림이 강물의 윤슬처럼 일었다. 걸음이 저절로 멈추었다. A초등학교 남동쪽 석축 앞이다. 두 만남이 기다렸다. 얼른 핸드폰 사진을 찍었다. 눈물 나게 반가운 만남이다. 하지만, 가슴이 시려왔다. 작은 한 존재의 움직임이 예전 모습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애처롭다. 겨울나기에 온몸의 힘을 다 써버린 것일까. 겨우내 몸을 떨어 열을 내며 서로 보듬어 무리를 봄날처럼 따사하게 만들며 추위를 물리치고 살아남는 존재들. 저들은 안쪽과 바깥쪽 자리를 번갈아 서로 바꿔가며 모두를 따뜻이 지켜낸다니…, 사람보다 낫다. 요 며칠 동안 우울한 뉴스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붉은피톨 예지몽

아차! 하는 순간, 왼손 약지가 뜨끔했다. 얼른 장갑을 벗었다. 약지엔 선혈이 낭자하다. 아리기 시작하였다. 무작정 피 솟는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었다. 멍하니 서서, 낫질하던 순간 벌어진 일을 잠시 되돌아보았다. 상처가 쓰라렸다. 어디선가, ‘상처가 더러우면 잘 안 낫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 밑에 물이 흐르는 옆 도랑으로 갔다. 여름 늦은 오후, 산골짜기 도랑의 바위틈으로 내려오는 물은 차고 맑았다. 감아쥔 오른손을 풀고, 왼손을 물속에 넣으며 상처를 보았다. 첫째 마디에서 둘째 마디까지 베었다. 낫 날이 얇은 약지 피부를 파고들어, 뼈가 허옇게 드러나 보였다. 덜컥 겁이 났다. 상처 부위를 대강 씻었다. 멈추던 피가, 씻는 바람에 다시 솟아났다. 물이 차가워 선지 상처가 별로 아프지도..

표본 경고등

등록일 2022.03.20 20:20 게재일 2022.03.21 표본(標本)이 반란을 일으켰다. 모집단(母集團)을 두 표본으로 나눠 이달 치른 3·9 제20대 대선 개표 결과 이야기다. 표본에서 통계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결과가 나왔으니 말이다. 개표 날, 나도 밤을 꼬박 지새웠다. 초저녁 사전투표 함을 먼저 개표하여 여당 후보가 앞서갔다. 여론조사 결과와 다르게 나오는 점이 이상했다. 선거 공정성 회복을 위해 부정선거 척결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가 생각나 ‘그럼, 그렇지’하는 마음도 들었다. 당일 투표함이 열린 후부터 제1야당 후보가 표 차를 따라잡아 역전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젊은 날, 경영학을 배우며 공부했던 통계학책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모집단은 ..

희생의 강

등록일 2022.03.13 18:08 게재일 2022.03.14 이게 어찌 된 거지. 돌연변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이리 추운 겨울을 저 어린것이 밖에서 오롯이 버텨내다니. 모를 일이다. 아무리 기후변화 시대라지만, 올겨울도 영하 섭씨 7~8도를 넘나드는 날씨가 몇 번 지나갔는데 말이다. 성당 오가는 길목에 커다란 대문 앞을 지난다. 대문 양쪽에 벽돌을 쌓아 올려 허리춤쯤 높이에 작은 화단이 하나씩 있다. 나 같으면 그냥 벽돌 벽이나 콘크리트 벽으로 마감했을 공간인데, 집주인은 화단을 만들었다. 꽃이 피면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도록 적당한 높이도 배려하였다. 집주인의 꽃사랑이 화단으로 태어났기에, 오갈 땐 늘 기분이 좋아진다. 언제부턴가 양 화단에 탐스러운 장미들이 피어났다. 왼쪽에 장미 여남은 그루, ..

그래도 살만한 세상

등록일 2022.03.06 18:15 게재일 2022.03.07 차를 몰고 돌아오는 도중이다. 웬일인지 뭔가 찜찜했다. 도착하자마자, 가지고 갔던 봉투 서너 개 속 서류를 손가락으로 벌려가며 두세 번 안을 살펴보았다. 호주머니도 다 뒤졌다. 그래도 가지고 갔던 통장과 법인카드가 든 비닐 커버는 보이지 않는다. 조수석에다 봉투의 내용물을 다 쏟았다. 하지만 찾던 물건은 없다. 돌아오면서 이상하게 찝찝하던 기분이 이해되었다. 담당 공무원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그도 가져가지 않았단다. 분실이 확실해졌다. 통장 잔고가 없어 분실해도 금전적 손해는 안 보지만, 새로 통장과 카드를 발급받으려면 성가신 게 사실이다. 군 제대 후 대기업 실험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실험분석과 품질관리, 환경 관련 실험과 분석, 관리를..

1등 몰아주기 문화

등록일 2022.01.02 18:55 게재일 2022.01.03 매주 목요일마다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제법 오래전부터 보아 온 것이다. ‘미스트롯 1’과 ‘미스터트롯’과 ‘미스트롯 2’ 그리고 ‘내일은 국민가수’다. 트로트는 우리 정서에 잘 어울리는 대중가요이기에 처음부터 거의 보았다. 무엇보다 경연에 도전하는 이들이 무대에 나서면 하나같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진한 기쁨과 감동을 듬뿍 선물해주었다. 삶의 희망과 용기도 북돋아 주었다. ‘지난날 나는 왜 저 참가자들처럼 모든 걸 쏟아붓는 삶을 살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기도 했다. 그런데 끝에 톱7을 뽑고 1등을 시상하는 장면은 좋았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선 시상 범..

낙엽 이불

등록일 2021.11.30 18:40 게재일 2021.12.01 낙엽경기라도 벌어진 걸까. 높하늬바람이 내려 부는 아침, 출근길이 온통 낙엽축제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정신없이 하늘을 난다. 은행잎은 갈 곳 잃은 노랑나비들의 군무를 춘다. 멀리 커다란 느티나무는 어느새 앙상한 몸이다. 사시 푸를 것만 같던 벚나무도 옷을 거의 다 벗었다. 시선이 나무 밑 잔디밭에 머문다. 샛노란 은행잎들이 매스게임이라도 하듯 정연하게 도열해있다. 말라가는 잔디이파리 사이사이에 은행잎이 들어있는 모습이 아늑하다. 순간, 은행잎들이 작은 황금색 이불로 보였다. ‘내년 봄도 새싹을 돋구려면 겨울잠을 잘 자야 해….’ 은행나무가 잔디에 조곤조곤 일러주는 말이 귀를 일깨운다. 도로 가장자리나 가로수 아래 잔디밭과 화초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