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99

도꼬마리 머리

등록일 2023.02.02 16:46 게재일 2023.02.03 보도(步道)의 하늘에 커다란 도꼬마리 머리들이 줄지어 안겨있다. 지나다니는 방송국 구내에는 더 큰 도꼬마리 머리들도 여기저기서 하늘을 안고 있다. 도꼬마리 모습의 저 머리들은 겨울 하늘과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그들이 무슨 말들을 주고받는지 알듯 모를듯하다. 지난봄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사람에게 지체를 무참히 잘려버린 저 생명체들. 말하지도, 울부짖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 오롯이 제자리에 서서, 사시나무처럼 떨며 생으로 팔뚝들을 잃으며 몸부림치던 참상이 눈에 선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이, 날카로운 기계 소리를 타고 귀청을 후려치던 느낌이 지금도 따갑다. 남은 팔뚝들은, ‘의식주 재료를 자연에서 구하는 일 이외의 어떤..

아빠, 해고야

등록일 2023.01.19 17:50 게재일 2023.01.20 “아빠, 해고야!” 지난 늦가을 오후, 냇가에서 다섯 살 맏손자가 제 아빠에게 불쑥 던진 말이다. 순간, 무슨 말인지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이는 이어 말했다. “아빠! 오늘 메뚜기 못 잡으면 해고란 말이야.” 그제야 나도, 제 아빠도 녀석의 말을 알아들었다. 녀석은 같은 말을 서너 번 반복하며 아빠의 대답을 재촉했다. 아들의 당돌한 말에, 아빠는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하긴 제 아빠가 낚시할 때, 여기서 메뚜기를 보았다고 녀석에게 자랑하며 잡으러 가자고 했다니 그럴 법도 하다. 내가 말했다. “그래. 우리 함께 메뚜기 부지런히 잡아보자!” 우리 집 3대 남자 셋은, 이렇게 메뚜기를 찾아 나섰다. 벼를 베고 논이 텅 빈 지 한참 지났다...

카테고리 없음 2023.01.19

첫 1박 가족 나들이

등록일 2023.01.05 17:51 게재일 2023.01.06 첫 1박 가족 나들이를 하였다. 우리 포항 식구의 1박 2일 모임이다. 당일 모임은 많이 했지만, 바닷가 펜션에서 하룻밤 자면서 가진 나들이는 처음이다. 두 아들이 비교적 늦은 입지(立志)의 중, 후반기에 결혼했었다. 이에, 손주 둘도 늦게 보게 되었다. 올해 큰손주가 다섯 살, 작은 손주가 세 살이다. 재작년 초부터 불어닥친 코로나19 사태는, 가족 전체가 한자리에 못 모이게 했다. 명절도 각 집으로 나누어 보냈고, 각종 모임도 중단되어 현재까지 지속되는 것도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가까운 해외라도 온 가족여행을 다녀오게 했을 터다. 저 지난주 내 생일 축하 식사 모임에서, 가까운 야외에 펜션을 빌려 우리 가족 ..

외롭던 이야기방

등록일 2022.12.11 17:47 게재일 2022.12.12 허전하다. 출퇴근 때마다 모서리를 돌며 안을 쳐다보던 작은 방이 사라졌다. 사라진 바닥엔 정사각형 새 보도블록이 어설프게 깔렸다. 작은 방은 이따금 풋풋함이 넘쳤다. 중학생들이 한두 명 혹은, 두세 명 붙어서서 손에 든 것에 귀를 들이대며 얘기꽃 피우던 방이다. 때론 깔깔대고, 때로는 희죽거리거나 히죽대고, 어떤 날은 어두운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옆엔 아파트 모델하우스와 은행도 있지만, 내가 본 이야기방은 중학생들을 빼면 거의 비어있었다. 하여, 운동장 밖 모퉁이에 홀로 섰던 이야기방은 외로워 보였다. 외로움 못 이겨 떠났을까. 시대 변화가 잘 드러나는 곳의 하나가 된 이야기방, 이름하여 ‘공중전화 부스’다. 공중전화는 통신수단의 발전 단..

시대, 헷갈리다

등록일 2022.12.04 18:21 게재일 2022.12.05 ‘날더러 어찌 살라고 이리도 갑자기 불어닥칩니까. 야속해요. 헷갈려요!’… 학교 담장에서 들려 오는 소리다. 소리 내는 장미꽃 붉은 볼에 냉기가 스며있다. 좀 듬성듬성하게 아직도 푸른 잎 사이로, 네댓 송이 장미꽃 붉은 볼이 초겨울을 밝힌다. 11월 마지막 날부터 밀어닥친 한파를 담장에 매달린 채, 장미꽃은 무방비로 사흘째 견뎌내고 있다. 더 매서운 칼바람 덮쳐오면, 저 장미꽃과 잎은 산 채로 얼어버릴 것이다. 그리곤 마른 미라가 되었다가 스러져 갈 테지. 운 좋아 장미 뿌리 사는 땅에 떨어지면 훗날, 장미꽃으로 환생할 수도 있으리라. 장미뿐만 아니라 아직 잎 푸른 나무와 많은 풀, 꽃을 피워낸 화초들도 높바람에 헷갈리다 산 채로 얼어 생을..

만남, 20221124

등록일 2022.11.27 17:48 게재일 2022.11.28 눈길이 저절로 멈추었다. 늦가을, 그것도 11월 하순에 이런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평소 출근보다 1시간 빠른 출장길이다. 북향 7번 국도가 제법 붐빈다. 벌어먹으려고 직장가는 차들이 꼬리를 문다. 알게 모르게 이 근교에도 일자리들이 생긴 결과이리라. 송라를 벗어나자 차량이 줄었다. 저지난밤 100mm 안팎의 많은 가을비가 내렸던 흔적이 도로 가나 들녘에 드러나도, 생각만큼 심해 보이지 않는다. 일찍 집을 나선 덕인가, 경고인가, 깨우침인가. 눈길 멈춘 곳 앞 도로 가드레일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원자력 발전소의 한 건물 녹지 곁 도로다. 찬찬히 살펴본다. 저쪽 크지 않은 앙상한 모과나무 밑에, 노란 모과 한 개가 낙엽과 섞인 푸른..

착한 목자

등록일 2022.11.20 17:46 게재일 2022.11.21 안도의 숨을 쉰다. 기사를 자세히 보니 가톨릭 신부가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신부란 사람이, SNS에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온 국민이 ‘추락을 위한 염원’을 모았으면 좋겠다”라고 했을까. 하지만 그 안도의 숨이 멎기도 전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는 대통령 부부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이미지와 함께 추락을 기원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어안이 벙벙하고, 소름 돋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어찌 된 사람들일까. 성직자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택한 이가 아닌가. 내 편과 상대편은 물론, 지구촌과 삼라만상을 품어내는 인생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제직을 선택한 사람들이기에 믿으며 존경..

땅 밟고 걷기

등록일 2022.11.14 게재일 2022-11-15 웬일인지 요즘은 저쪽 길로 발길이 향한다. 보도를 마다하고 간다. 개방된 녹지에 저절로 난 오솔길이다. 늦가을이다. 오솔길은 잔디밭과 나무들로 이루어진 학교 녹지에 있다. 없던 길이 언제부턴가 생겨났다. 느티나무잎, 플라타너스잎, 은행나무잎, 이름 모르는 나뭇잎도 떨어져 있다. 그 곁 스테인리스 파이프 담장엔 장미 덩굴이 아직 푸르다. 세월이 아쉬운가 보다. 낙엽 깔린 땅을 밟는 느낌은 맨땅의 그것과는 다르다. ‘구르몽의 숲’으로 가지 않아도, 긴 시간 없어도, 일부러 안 와도 출퇴근길에 늦가을 정취를 만끽한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거리는 아스팔트나 보도블록, 시멘트 마당으로 이루어져 땅을 밟지 못한다. 도시인은 다 그럴 것이다. 요즈음엔 시골..

카테고리 없음 2022.11.15

은행나무 유감

등록일 2022.11.06 19:38 게재일 2022.11.07 가로수 은행나무잎들이 황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은행잎들은 노랗게 변신할 것이다. 샛노란 얼굴로, 새봄처럼 가을을 밝힐 은행잎…. 불어오는 하늬바람에 은행나무낙엽이 노랑나비 되어 팔랑팔랑 추는 군무를 바라보는 가슴은 기쁨이자 슬픔이며, 멀고도 가까운 저 너머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자, 기대이기도 하다. 은행 종자 떨어진 가을 보도(步道)엔 아슬아슬 인생길 곡예가 공연된다. 떨어진 은행을 요리조리 피하며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공연이다. 실수로 은행을 밟으면, 신발 밑창에 그 외종피의 고약한 냄새가 착 달라붙는다. 한 번 뭍은 냄새는 그냥 두면 오래 가 사람 기분을 언짢게 한다. 악취를 없애려면, 신발 바닥을 꼼꼼히 씻어내야 하는..

살아있는 우스개

등록일 2022.10.16 18:00 게재일 2022.10.17 내 차례가 되었다. 아주머니는 비닐봉지에 땅콩 한 됫박을 부어 넣었다. 앞서 샀던 여자분처럼 내게도 한 움큼 더 주기 위해 좌판의 땅콩을 집는 순간, “며칠 전 집사람이 사 왔었는데 무게가 모자라던데요.”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두말 안 하고 두 움큼을 더 주었다. 이에 먼저 샀던 여자분이, “왜 이분에겐 더 줘요?” 하고 불평하였다. 단박에 아주머니는, ‘살아있는 우스개’를 한 방 날리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도, 여자분도 폭소가 터져 나왔다. 기분이 뛸 듯이 상쾌해졌다. 우스개의 요술에 빠졌나 보다. 발걸음 가볍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땅콩 봉지가 보무도 당당하게 갈바람에 나붓거렸다. 우스개 한 마다가 이렇게 사람 기분을 좋게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