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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묵주 반지

등록일 2021.06.21 20:09 게재일 2021.06.22 밖에서는 묵주 반지를 끼고 다닌다. 걸으면서 기도하기 위해서다. 처음 성물(聖物) 판매소에 묵주 반지를 팔면서부터였으니, 강산이 몇 번은 변한 세월이다. 내 것은 은 묵주 반지다. 금 묵주 반지는 비싸서 우리 성당 판매소에는 예나 지금이나 없다. 묵주 반지는 간편하게 묵주기도를 바치기 위해 만든 도구다. 묵주 알이 59개나 되는 5단 묵주는, 외출 시엔 불편해서 묵주 반지를 쓰는 신자들이 많다. 김연아 선수가 묵주 반지를 끼고, 성호를 그으며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하는 장면을 볼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었다. 묵주 반지 낀 사람을 보면 어디서든 한 가족 같은 느낌을 받는다. 4년 전 봄, 제19대 대통령이 취임했었다. 집무실에서 일하는 새..

장미, 함박웃음 메시지 내다

등록일 2021.06.06 20:03 게재일 2021.06.07 요즈음은 아침마다 즐겁다. 또, 당황스럽다. “어서 오세요. 잘 다녀오시고요. 호호!”하고 함박웃음 머금은 인사를 받으며 출입문을 나서기 때문이다. 문 오른쪽, 담장과 서로 벗 삼아 기대어 활짝 핀 얼굴들이 초록 손을 흔든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같은 담장과 그 벗이었다. 한데, 올해는 왜 유달리 사람을 더 사로잡으려는 듯 일제히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일까. 웃는 벗과 어우러진 담장이 이렇게 아름답고, 고마운 줄 올해 처음 알았다. 원래 아름다운 모습에다, 절박한 시대의 메시지까지 덤으로 선물하니 어찌 기쁘고 고맙지 않을 수 있겠는가. 1년 반 이상 이어지는 안개 속 코로나19 감염병 사태. 강제로 시행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는 국민의 일상..

명함전단지와 풀뿌리 민주주의

등록일 2021.05.16 18:41 게재일 2021.05.17 출근길마다 사무실 입구에서 하는 일이 있다.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지만 벌써 몇 년째다. 명함전단지(名銜傳單紙)를 한쪽 구석으로 모으는 일이다. 보통 네댓 장, 많은 날은 여남은 장이 될 때가 있다. 보기 지저분해 처음엔 투덜대며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일일이 주워 사무실 쓰레기통에 버렸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버려진 명함전단지만 줍는 연로한 분들이 생겨났다. 그 후부터 한쪽 구석진 곳으로 모아둔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어떤 날은 손으로 주워 한곳에 모아두거나 어느 날은 발로 툭툭 차 한곳에 모이게 하기도 한다. 점심때 나가면 명함전단지들은 그사이 누가 다 가져가고 없다. 어느 날 광고 내용을 한번 보고 싶었다. 모두가 돈을 급전으로 빌려..

살아있는 모자이크

등록일 2021.04.14 20:10 게재일 2021.04.15 누가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다. 살아있는 모자이크다. 한데, 만드는 이가 안 보인다. 나풀나풀 하늘에서 흰 나비 날개들이 내려올 뿐이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작업을 하나 보다. 삼월 말, 수난(受難)주간 마지막 날 성당 가는 보도(步道) 위다. 다른 나무들은 벌써 신록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벽돌 담장 위에 얼굴을 빼꼼히 내민 장미 아가씨의 새순은, 어느새 길이가 한 뼘은 되어 보인다. 잎 사이에 꽃망울도 품었다. 꽃샘추위가 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바야흐로 봄이다. 기후 변화로 많이 앞당겨진 봄…. 봄은 내게 언제나 불쑥 나타났었다. 올해도 그랬다. 무심히 걷던 보도 위에서, 갑자기 ‘살아있는 모자이크’로 다가온 것이다. 새봄맞이 자연 모..

또다시 온 삼월

등록일 2021.03.24 19:43 게재일 2021.03.25 세레나. 또다시 삼월이 왔습니다. 작년 삼월은 정월부터 불어 닥친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병에 정신이 홀려버렸었지요. 그 때문에 봄 편지 한 장 못 쓰고 지나갔었습니다. 세레나도 그랬다고요. 아마도 지구촌 모든 이가 그리 살았을 터입니다. 올 삼월에도 자연은 솟아나는 연록 새싹들의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목련, 살구, 복숭아, 벚나무가 잇달아 사랑을 꽃피웁니다. 저 낮은 곳에는 하얀 별꽃과 파란 까치꽃들이 앙증스레 봄을 뽐내고 있고요. 한데 우리 사회와 지구촌은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코로나 19 바이러스 전염의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언제쯤 우리는 마스크를 벗어 던질 수 있을까요.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박주가리 날틀

박주가리 날틀 강길수|姜吉壽 하늘이 코발트블루다. 작은 날틀 하나가 높하늬바람 타고 하늘에 떴다. 어디로 뭘 하러 가는 걸까. 날틀은 비행기도, 로켓 우주선도, 드론도, 외계인의 비행접시도 아니다. 누에고치섬유 같은 갓털이 주인 하나 달랑 달고 나를 뿐이다. 한 올 한 올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는 갓털이다. 작은 것들도 모이면 큰 힘을 내는 법. 무수한 갓털은 주인을 꽉 부여잡고 바람 타고 나른다. 바람이 세게 불면 한 방향으로 모여 빨리 날고, 약해지면 산발한 여인의 머리처럼 이리저리 흩날리며 지그재그로 곡예를 한다. 그 나르는 모습이 꼭 소문 무성한 외계인 비행접시의 비행을 연상케 한다. 갑자기 날틀이 처박힐 듯 빨리 내려온다. 추락하는가 보다.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떤 날틀인지 보..

우리 새싹들에게

등록일 2021.03.03 20:13 게재일 2021.03.04 우리 두 새싹, 태극이와 광복아! 너희들 만난 지가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또 보고 싶구나. 너희 아빠들 자랄 때 보다 우리 새싹들이 더 보고 싶으니,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할아비와 할미에겐, 너희들이 가장 소중하고 큰 행복이란다. 지금은 세상이 어찌 변할지 모를 혼돈시대다. 하여, 우리 새싹들에게 무언가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될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련다. 일주일만 있으면 3월이 되는구나. 봄이 온다는 뜻이지. 입춘과 우수도 지났으니 지금도 봄일 테지만, 경험상 3월부터 봄이라 하고 싶다. 할아비 유년기의 봄은 아직도 선명한 기억 하나가 있다. 바로 새싹이란다. 고향 산골에 3월이 오면, 앞산 뒷산의 눈이 녹아 개울마다 도랑마다 맑은 ..

커피 가루 딱지 치료

등록일 2021.02.03 19:57 게재일 2021.02.04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자전거가 황급히 멈추면서 몸이 고꾸라지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살기(殺氣) 등등한 괴물로 달려들던 청백색 승용차가 아슬아슬 코앞을 스치며 달아났다. 본능적으로 일어나 엎어진 자전거를 세웠다. 아무 느낌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절로 바라본 문제의 차는 벌써 저만치 뺑소니치고 있다. 아스팔트 노면에 부딪힌 왼쪽 무릎이 아파졌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황당했다. 일방통행 이면도로의 작은 교차로에서 당한 아차 사고…. 기겁하여 자전거와 함께 자빠지며, 급발진 차량처럼 돌진해오던 차를 속수무책 쳐다만 보던 순간이 되살아나 머리를 아찔하게 하였다. 운전자가 미웠다. 그는 멈춰서야 했다. 멍한..

부활한 성탄 트리

등록일 2021.01.13 20:01 게재일 2021.01.14 몇 해를 망설였다. 일을 미루는 버릇이, 삶에 큰 마이너스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불치병처럼 고치지 못했다. 이번에는 자신뿐 아니라, 한 생명에게 큰 잘못을 하고 말았다. 접이식 작은 톱을 들고, 몇 년 동안 미루던 일을 하러 간다. 그 생명 앞이다. 낮은 밭둑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던 터라, 제법 늠름하다. 행사 때 묵념하듯 속말로 사전 고해성사를 한다. “소나무야, 미안하다. 이제 더는 너를 여기에 둘 수 없구나. 어릴 때 옮겨 주지 못해 더 미안하다. 부디, 다음 생은 좋은 곳에 자리 잡으렴….” 사람이라면 아동기에 해당할 소나무다. 밑동 둘레가 두 손으로 움켜잡으면 굵기가 조금 남을 정도로 컸다. 밑동에서 허리춤 정도 올라..

세모로 가는 장미

등록일 2020.12.16 19:34 게재일 2020.12.17 지지 않는 꽃이라도 된 걸까. 세모(歲暮)로 가는 12월 중순. 밤에 서리가 내릴 기온인데, 붉은 장미가 제법 많이 피었다. 높은 적색 벽돌 담장 위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초록 잎 스카프 두르고, 앳된 볼을 붉히며 일제히 해를 바라본다. 오뉴월의 화려한 얼굴의 장미는 아니지만, 사춘기 소녀같이 수줍다. 봄, 여름, 가을 다 겪은 장미가 어찌 저리도 풋풋한 얼굴을 피워낼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라면 저승 문턱을 넘었을지도 모를 때인데, 아직도 이팔청춘을 구가하고 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마치 금단의 집이라도 되는 양, 옛 성채(城砦)같이 높은 담장 위로 피어난 수줍음에 신비스러운 기운마저 감돈다.오랜 세월, 숱한 곳에서 많은 장미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