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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보내기

등록일 2020.11.25 19:53 게재일 2020.11.26 늦가을…. 보도의 벚나무가 벌거숭이가 되어간다. 어떤 나무는 아직 절반 정도의 옷을 입고 있으나, 어느 나무는 팔 할 이상을 벗었다. 전체적으로 대강 삼분지 이 정도는 옷을 벗어 보인다. 가슴이 움찔움찔하는 것만 같다. 사제나 주송자(主誦者)가 고인의 세례명을 넣어 기도하거나, 말할 때마다 그랬다. 꼭, 내가 저 관 안에 누워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강론 시간에 사제는 친절하게도, 고인의 세례명을 뜻풀이까지 하면서 여러 번 부르며 애도하였다. ‘이 미사에서, 입관 체험교육 이상으로 삶과 죽음을 체험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젊은 날부터 장례미사에 많이 참례(參禮)해 왔다. 하지만, 오늘 같은 느낌은 처음이다. 고인..

핑크빛 주유권

등록일 2020.10.28 19:41 게재일 2020.10.29 여직원이 불렀다. 친구의 사무실 문을 나서는 참이다. 뒤돌아서니 명함크기만한 봉투를 내밀었다. 뭐냐고 묻자, 사장님이 드리라고 한다는 말만 남기고 여직원은 총총 안으로 가버렸다. 조금 의아한 기분으로 봉투를 주머니에 넣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벌써 때 이른 가을 저녁노을이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다. 차에 돌아와 봉투를 열었다. 핑크색 주유권 한 장이 들어있다. 보너스 카드 포인트로 주유권을 받은 적은 있지만, 손으로 내용을 적은 주유권을 받기는 처음이다. 사무실에서 직접 주면, 내가 곤란해 할까 봐 배려하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편치만은 않았다. 만나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동정(同情..

조혼 페스티벌

등록일 2020.10.07 20:07 게재일 2020.10.08 이곳저곳에서 결혼식 팡파르가 울린다. 노란 예복을 차려입은 민들레 아가씨들의 결혼식이다. 새로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데 벌써 결혼을 한다. 조혼(早婚)이라도 너무 이른 혼인이다. 어디 그뿐이랴. 민들레 아가씨들에 뒤질세라 벌써 돌잔치를 푸짐하게 벌이는 강아지풀들이 도처에서 싱글벙글한다. 함께 어우렁더우렁 사는 풀들의 축복을 받으며 풋열매를 단 강아지풀 꼬리들이 바람에 살랑댄다. 한족에서는 참새 떼가 작은 바랭이 열매로 아침밥을 먹는다. 가까이 다가가자 우르르 밥상을 물리고 날아오른다. 참새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바랭이들에게는 내가 고마운 과객이 아닐까. 다른 곳은 외래종으로 보이는 풀들도 꽃을 피우고 있다. 한여름 천지개벽보다 더할, 몸..

디어 위너

디어 위너 등록일 2020.09.09 20:00 게재일 2020.09.10 영문 이메일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내용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나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다. 정말 행운의 소식이면 좋겠다. 이메일은 영문 ‘디어 위너(Dear Winner)’로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당첨자’라니, 우선 기분이 좋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내용을 대충 살폈다. 내 이메일 주소가, 올해 자사의 이 메일 프로모션에 당첨되어 축하한단다. 당첨금이 원화로 환산하니 무려 150억 원이나 되었다. 일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체 내용을 빨리 알기 위해, 인터넷의 영문번역기에서 전문을 우리말로 바꿔보았다. 따로 추첨에 참여하거나, 티켓을 끊을 필요는 없단다. 단지 이름, 주소, 나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만 답신으로 보내면 된..

살아내기

살아내기 등록일 2020.08.19 20:03 게재일 2020.08.20 얼마나 아팠을까. 나 같으면 까무러쳐 깨어나지도 못했을 테다. 그런데도 다시 몸을 추스르고, 연녹색 맑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의젓해 보인다. 도대체 생명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억척스러운가. 며칠 전 땀을 훔치며 이 곁을 지나갈 때다. 방금 풀을 베었는지 향긋한 풀냄새가 팔월 상순 대낮의 더위를 봄 나비 날개처럼 팔랑팔랑 날려버렸었다. 이 녹지 곁을 하루에 두서너 번은 지나다닌다. 출퇴근과 점심 먹으러 갈 때 다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엔 주로 자전거로 오가지만 그 외의 철엔 걸어서 지나간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을 초지로 만든 곳이기에, 자라나는 아이들과 푸른 녹지가 잘 어우러져 저절로 관심을 끌..

광복이의 3+1 뽀뽀

광복이의 3+1 뽀뽀 등록일 2020.07.29 게재일 2020.07.30 광복이의 첫 거울 뽀뽀가 삼삼하다. 동영상 안 거울에 비친 녀석의 얼굴 모습이 마음을 종잡을 수 없게 한다. 콕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온갖 느낌이 한순간에 파도로 몰려오니 말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 마음 밭에서 죽순처럼 돋아난다. 동영상을 켜기 전 정지 화면은 이렇다. 녀석은 왼발을 쪼그리고 오른발은 주저앉은, 반 쪼그려 앉은 자세를 거울 앞에 취하고 있다. 얼굴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향하고 있다. 그 표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천진하면서도 진지하다는 말밖에 더할 수 없다. 왼손은 손가락을 펴서 거울에 대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를 반쯤, 검지는 다 폈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오므리고 검지가 거울에 비친 ..

시대 징표 바라보기

등록일 2020.07.08 20:11 게재일 2020.07.09 등산길에 뭔가 이상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데도 땅거미가 내릴 것 같이 주위가 시나브로 어스름해지니 말이다. 오후 네 시가 지났지만 하지라는 날을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징표(徵標)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알아볼 마음을 먹지 않고 덤덤하게 넘어갔다. 밤에 인터넷에서 오늘 오후 부분일식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숲속에서의 징표가 그 의미를 찾으며 의문이 풀렸다. 부분일식 징표였는데 내가 너무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다는 자각이 뒤따랐다. 어릴 때만 하더라도 시골에는 라디오도 흔치 않았다. 날씨예측도 징표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늘, 구름, 바람, 공기의 습한 정도, 동물이나 곤충들의 행동, 몸의 반응 같은 것들을 이용했다. 방법도 어떤..

지식

지식 등록일 2020.06.17 19:51 게재일 2020.06.18 쪽지가 잘 나오지 않는다. 앞선 이들은 한 번에 잘도 집어내던데, 나는 그러지 못하다. 아마도 다른 쪽지들보다 깊게 꽂혀있거나, 약하게 뽑았을 것이다. 두 번째 당겨도 역시 마찬가지다. 당황스러워지며 뒤에서 기다리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왼손 엄지와 검지에 힘을 더 주어 뽑아낸다. 세 번 시도 끝의 성공이다. 삼세번 당겨 손에 잡은 불혀 모양의 연녹색 성령칠은(聖靈七恩) 낱말쪽지…. 어느 은혜를 선택했을까 아니, 주어졌을까. ‘코로나 19로 모두가 어렵게 사는 지금 내게 긴요한 은총은 무얼까’하고 마음이 자문하지만, 미사 중에 열어볼 수가 없다. 공지사항 시간에 보리라 마음먹고, 궁금증도 함께 담아 매일미사 책갈피에 넣어 둔다..

하얀 오월

하얀 오월 등록일 2020.05.27 20:07 게재일 2020.05.28 ------------------------------------------------------------------------------------------------------------------------------- 마르첼리노…. 오월을 어떻게 지내고 있나. 삼월인가 했더니 눈 깜짝할 새 사월이 가고, 오월도 하순에 접어들고 있다. 연녹색 나무가 순식간에 신록으로 변해 눈앞에 넘실댄다. 자연은 예나 다름없이 묵묵히 제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오월은 어디를 걷고 있는지 헷갈린다. 가만히 올봄을 되돌아본다. 내 봄은 별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지 싶다. 춘분이 한 달가량 남은 날이었지. 가로수 보호대 사이를 비집고 올..

같지만 다른 봄

같지만 다른 봄 등록일 2020.05.06 19:58 게재일 2020.05.07 강길수 수필가마스크를 쓰고 철길 숲 산보에 나섰다. 봄을 타는지 몸이 나른해서다. 늘 가던 코스 따라 초등학교를 가로지르려 열린 문을 들어섰다. 교사(校舍) 앞 화단에 선 매실나무는 열매가 토실토실 도토리만큼이나 컸다. 옆의 능금나무에는 하얀 꽃잎이 자태를 뽐내며 일부 꽃은 지고 있다. 어느새 봄이 매우 짙어졌다. 저만치 떨어진 주차장에 승용차 한 대만 외롭다. 사람이라곤 그 앞으로 쓰레기 정리하는 분 한 명뿐이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휴일이면 제법 많은 이들이 운동장을 걷거나, 녹지의 쉴 곳에서 삼삼오오 이야기꽃이 피어나곤 했었다. 이 교정(校庭)은 주민들의 운동과 휴식, 소통의 공간이었다. 한데, 지금은 텅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