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기 174

3일간의 행복

등록일 2022.07.17 17:58 게재일 2022.07.18 ‘우와! 이게 웬 복이야! 나라꽃을 이곳에서 만나다니….’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순간, 숙소가 멀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사흘간 오가며 나라꽃 무궁화의 웃음을 보며 오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초등학교 때 배웠던 ‘우리나라 꽃’ 노래가 절로 흥얼거린다. 칠월 중순의 둘째 날 아침이다. 숙소가 교육장과 멀어 조금 언짢았던 기분이 되살아나며 모텔 문을 나섰다. 첫 길이라 얼마간 이곳저곳 돌면서 교육장 가는 길을 찾았다. 간선도로에 연결된 주택지 도로다. 노변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얼굴, 목, 등에서 땀이 났다. 그런데 초입을 들어서자, 보도에서 활짝 웃는 얼굴들이 도열하고 서서 오는 이를 반기고 있는 게 아..

초록 풀머리

등록일 2022.07.10 18:00 게재일 2022.07.11 졸지에 유명을 달리한 지체(肢體)들의 한이 원혼으로 변해 빙의라도 한 것일까. 짧게 남은 팔뚝들에 숨 막힐 듯 많이 솟아난 잔가지들이, 명부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의 초록 풀머리로 보이니 말이다. 하늘로 굵은 팔들을 벌려 연록 생명을 뽐내던 곳이, 인간의 기계톱으로 갑자기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변하던 봄날의 일이 되살아난다. 석 달이 지났다. 팔뚝들이 댕강 잘려 나갔던 언저리에 초록 풀머리들이 빼곡하다. 죽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나무가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쳤으면, 전설의 고향 프로에 나오던 귀신보다 더 빽빽한 풀머리를 달아냈을까. 웬일인지 눈길이 자꾸 초록 풀머리에 머문다. 가지치기 전문가들은 나무의 디엔에이가 작용해 그러니, ..

염치 아는 사람

등록일 2022.06.26 18:00 게재일 2022.06.27 바뀐 녹색 신호등에 따라 횡단보도를 중간쯤 걸어갈 때다. 느닷없이 좌회전 소형 승용차가 스르르 앞을 가로막았다, 승용차 앞바퀴가 횡단보도의 흰 선을 한 걸음쯤 차지하며 멈췄다. 속도가 느려 놀라지는 않았지만, 황당했다. ‘무슨 이런 차가 다 있어?’하고 속에서 부아가 나려는 순간, “죄송합니다!”라는 음성이 반쯤 열린 운전석 창을 달려 나와 마음을 감쌌다. 목소리는 염치를 아는 운전자의 진심을 실어와 정전기처럼 찌릿하게 가슴을 찔렀다. 마음에 일던 반감이 사르르 녹았다. 조건반사같이 운전자에게 접은 우산 쥔 손을 흔들며, ‘괜찮아요!’하고 속말을 얹어 보냈다. 쳐다보니 운전자는 동년배 정도로 나이 들어 보이는 분이었다. 동병상련 같은 감정도..

보석들의 희망

등록일 2022.06.07 18:09 게재일 2022.06.08 손을 흔들며 경보선수같이 빠르게 지난다. 스르르 멈춘 택시 앞이다. 평소 내 습관을 여지없이 깨부순 택시 기사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몸에서 세로토닌(serotonin)이라도 일시에 분비되나 보다. 운전자라면 누구나 상식이나 법상으로 멈춰 서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마음이 기쁘다. 살면서 저절로 관습법처럼 자리 잡은 게 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의 ‘운전자 통행 우선’이란 잘못된 행동양식이다. 그 관습법이 별안간 타파된 즐거움이리라. 오늘 퇴근길이었다. 첫 번째 신호등 없는 건널목에 도착하여 좌우를 살폈다. 왼쪽 2개 차로는 멀리까지 차가 없고, 오른쪽 차로에는 저만치 2대의 차가 간격을 두고 오고 있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건널..

씀바귀, 도심에 살다

등록일 2022.05.22 18:09 게재일 2022.05.23 보도 가에 흐드러진 붉은 장미꽃이 사람 마음을 흔든다. 뉘라서 저 장미꽃들의 향연에 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내 시선은, 낮은 곳 구석진 곳에서 또 다른 오월을 밝히고 있는 쪼그만 노랑 꽃에 더 머문다. 내일이면 생명 찬란한 5월도 하순으로 접어든다. 한낮의 햇빛이 따갑다. 보도 곁 잔디잎들은 절반쯤 누렇다. 가뭄 타나 보다. 그런데 잔디 사이에서, 이 목마름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노란 꽃들이 활짝 웃고 있다. 바로 씀바귀꽃이다. 잔디밭에 더부살이하면서도, 씀바귀는 움츠러들거나 가뭄 타지도 않고 해맑은 얼굴로 모두를 반긴다. 잔디도 씀바귀를 한 식구로 받아들여 사는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도 다정하게 보일 수 있겠는..

그 후, 한 달

등록일 2022.05.15 17:55 게재일 2022.05.16 합창 소리 가득하다. 경내로 내려꽂히는 따가운 5월 초순 한낮 햇살도 가세하여 함께 노래하고 박수갈채를 보낸다. 4월 초순 어느 아침, 이곳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소리가 뒤범벅된 아수라장이었다. 오랜 세월 자란 굵은 팔뚝들이, 아닌 밤중 홍두께로 툭툭 잘려 나가 너부러지며 아우성치는 현장이었다. 팔뚝 잘리는 큰 나무의 통곡도, 막무가내로 자르는 날카로운 기계음도 못 듣는 로봇 일꾼으로 변한 사람들…. 그 폭력의 잔상이 가슴에 남았다. 한 달이 지났다. 기계톱에 맥없이 잘려 떨어지는 팔뚝의 유탄에 맞아 일부 가지가 유명을 달리했던 장미는, 잃은 동기들을 기리려는 듯 더 커다란 붉은 꽃들을 피워냈다. 핑크빛 수줍은 볼로 웃으며 봄 마중하던 진달래..

코로나19 펜스

등록일 2022.05.08 18:06 게재일 2022.05.09 학교 녹지화단에서 영산홍꽃이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하지만, 갈 수 없다. 전 같으면 여러 사람이 정자나 곁 의자에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더러는 운동장을 걷고 있을 시간이다. 무엇이 마음에 걸리고 억누르는 것만 같다. 찝찝한 생각도 가슴을 붙잡는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 후 새로 세운 펜스 때문이다. 펜스는 녹지의 화단이나 정자, 의자 같은 시설물들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부지경계선 위에 무작정 놓아졌다. 그 바람에 녹지의 꽃과 나무, 편의 시설들이 그만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십여 년 전쯤, 전국적인 ‘담장 허물기’ 붐이 일었다. 초등학교는 물론 관공서, 종교시설까지 담장 허물기 사업이 벌어졌다. 국민 쉼터가 부..

무슨 바람

등록일 2022.04.24 18:18 게재일 2022.04.25 경내가 잔인하다. 울부짖음이 가득하다. 어제 퇴근 때는 연록 새 식구 맞는 노랫소리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한데, 오늘 아침엔 아파 우는 소리, 앓는 소리, 겁에 질린 소리가 마음 귀를 따갑게 파고든다. 게다가 커다란 기계음이 몸의 귀청을 마구 때린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소리가 뒤범벅되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일꾼들은 사다리차 작업대에 타고 기계톱 소리 한껏 올려, 몸통에 뻗어 오른 굵은 팔뚝들을 툭툭 잘라낸다. 통곡도 기계음도 못 듣는 로봇 일꾼 같다. 며칠 안에 연록 새 잎새들이 손가락마다 돋아나 생명을 찬양할 텐데, 그 꿈들도 댕강 끊어지고 있다. 잘린 팔뚝들은 바닥에 이리저리 떨어져 너부러진다. 그 서슬에 애꿎은 진달래꽃 가지와 장미..

만남, 20220316

등록일 2022.03.27 18:24 게재일 2022.03.28 2022년 3월 16일 오전 11시 38분. 보도를 걷다가 한 곳에 닿은 눈길에, 가슴 떨림이 강물의 윤슬처럼 일었다. 걸음이 저절로 멈추었다. A초등학교 남동쪽 석축 앞이다. 두 만남이 기다렸다. 얼른 핸드폰 사진을 찍었다. 눈물 나게 반가운 만남이다. 하지만, 가슴이 시려왔다. 작은 한 존재의 움직임이 예전 모습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애처롭다. 겨울나기에 온몸의 힘을 다 써버린 것일까. 겨우내 몸을 떨어 열을 내며 서로 보듬어 무리를 봄날처럼 따사하게 만들며 추위를 물리치고 살아남는 존재들. 저들은 안쪽과 바깥쪽 자리를 번갈아 서로 바꿔가며 모두를 따뜻이 지켜낸다니…, 사람보다 낫다. 요 며칠 동안 우울한 뉴스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표본 경고등

등록일 2022.03.20 20:20 게재일 2022.03.21 표본(標本)이 반란을 일으켰다. 모집단(母集團)을 두 표본으로 나눠 이달 치른 3·9 제20대 대선 개표 결과 이야기다. 표본에서 통계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결과가 나왔으니 말이다. 개표 날, 나도 밤을 꼬박 지새웠다. 초저녁 사전투표 함을 먼저 개표하여 여당 후보가 앞서갔다. 여론조사 결과와 다르게 나오는 점이 이상했다. 선거 공정성 회복을 위해 부정선거 척결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가 생각나 ‘그럼, 그렇지’하는 마음도 들었다. 당일 투표함이 열린 후부터 제1야당 후보가 표 차를 따라잡아 역전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젊은 날, 경영학을 배우며 공부했던 통계학책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모집단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