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기/발표 글-경북매일

그 후, 한 달

보니별 2022. 5. 15. 22:21

                       등록일 2022.05.15 17:55                                   게재일 2022.05.16

 

 

합창 소리 가득하다. 경내로 내려꽂히는 따가운 5월 초순 한낮 햇살도 가세하여 함께 노래하고 박수갈채를 보낸다.

 

4월 초순 어느 아침, 이곳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소리가 뒤범벅된 아수라장이었다. 오랜 세월 자란 굵은 팔뚝들이, 아닌 밤중 홍두께로 툭툭 잘려 나가 너부러지며 아우성치는 현장이었다. 팔뚝 잘리는 큰 나무의 통곡도, 막무가내로 자르는 날카로운 기계음도 못 듣는 로봇 일꾼으로 변한 사람들. 그 폭력의 잔상이 가슴에 남았다.

 

한 달이 지났다. 기계톱에 맥없이 잘려 떨어지는 팔뚝의 유탄에 맞아 일부 가지가 유명을 달리했던 장미는, 잃은 동기들을 기리려는 듯 더 커다란 붉은 꽃들을 피워냈다. 핑크빛 수줍은 볼로 웃으며 봄 마중하던 진달래도 악몽 같던 날 한쪽 꽃과 가지를 잃었는데, 그새 상처를 보듬고 초록 옷으로 갈아입었다. 단풍나무 등 작은 정원수들도 가지치기 아픔을 겪어내고 생기발랄한 잎들로 단장했다.

 

저절로 눈이 위로 향한다. 한 달 전, 온 팔뚝이 절반쯤 뚝 잘린 채 하늘에 의지하여 서 있던 활엽수들. 하지만 지금은, 남은 팔뚝들에 생명의 합창 소리가 가득하다. 굵은 가지들을 에워싼 새싹들이 시루에서 촘촘히 솟아오르는 콩나물 같다. 빼곡한 새싹들이 자라며 환호한다. 춤춘다. 긴 박수 보내며 큰 노래 부른다.

 

나무는 미래를 내다보며 사는 걸까. 제법 묵은 가지에 언제 저 많은 새싹을 틔울 눈을 마련하였을까. 산골에 나서 많은 나무를 벗하며 자랐다. 어린 시절, 꺾어 놀이도구로도 삼으며 함께한 나무들은 그렇게 많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시는 과수원의 사과나무나 자두나무도 그랬다. 하면, 나무들은 비상시를 대비한 예비 눈을 몸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말인가.

 

내가 저 나무들의 처지였다면, 새싹을 내보낼 눈이 없어서 지금 속수무책으로 몸이 말라가고 있을 것이다. 한 달 만에 어찌 저리 많은 새 눈을 만들어 싹을 피울 수 있으랴. 새싹들은 대부분 한 뼘은 자랐고, 어떤 것은 두 뼘 이상 커 잔가지가 되었다. 새 가지 중에 어떤 것은 큰 가지, 또 어떤 것은 잔가지가 될 것이다. 팔뚝 잃은 고통과 상처를 계속 치유하며 더 많은 가지를 가진 나무, 더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리라.

 

누가 나무를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나무의 주인행세를 할 수 있겠는가. 또 누가, 나무를 하찮다 떠들 수 있을 것인가. 졸지에 팔뚝들을 잃은 많은 나무 중 한 그루도 죽은 나무는 없다. 원망의 소리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무는 스스로 치유하고, 스스로 싹틔우고, 스스로 살고 있다. 만일 사람을 저 나무들처럼 취급한다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터다.

 

묵묵히, 그저 묵묵히 모든 것을 순종하며 사는 생명체가 나무다. 비가 오거나 오지 않아도, 햇볕이 엷거나 따가워도, 미풍이나 태풍이 불어도, 큰 더위나 살을 에는 추위가 닥쳐도 나무는 제 자리에서 굳건히 견뎌낸다. 나아가, 사람이 제 몸을 송두리째 베어 목재나 다른 쓰임에 써도 묵묵히 자신을 바친다. 나무는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존재다.

 

나도, 나무처럼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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