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기/발표 글-경북매일

보석들의 희망

보니별 2022. 6. 8. 00:31

                                등록일 2022.06.07 18:09                                              게재일 2022.06.08

 

손을 흔들며 경보선수같이 빠르게 지난다. 스르르 멈춘 택시 앞이다. 평소 내 습관을 여지없이 깨부순 택시 기사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몸에서 세로토닌(serotonin)이라도 일시에 분비되나 보다. 운전자라면 누구나 상식이나 법상으로 멈춰 서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마음이 기쁘다. 살면서 저절로 관습법처럼 자리 잡은 게 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의 운전자 통행 우선이란 잘못된 행동양식이다. 그 관습법이 별안간 타파된 즐거움이리라.

 

오늘 퇴근길이었다. 첫 번째 신호등 없는 건널목에 도착하여 좌우를 살폈다. 왼쪽 2개 차로는 멀리까지 차가 없고, 오른쪽 차로에는 저만치 2대의 차가 간격을 두고 오고 있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건널 수 있겠다 싶어 왼쪽 차로의 절반쯤 가다가 섰다. 차량을 보내고 가는 게 안전하겠다 싶어 엉거주춤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앞에 오던 택시가 스르르 멈춰 서는 게 아닌가. 물론, 뒤차도 따라 섰다.

 

그 옛날 이립(而立) 초반의 어느 날, 일본의 한 시골에서 만났던 광경과 느낌이 확 되살아났다. 세미나를 마친 가뿐한 주말 아침나절, 기차를 타고 온천 관광지 벳푸로 향했다. 지방도 근처를 지나는데, 저만치 횡단보도 곁에서 일고여덟 살로 보이는 아이들 몇이 서 있다. 멀리서 커다란 트럭이 그곳을 향해 온다. 트럭은 아이들이 몇 번 건너도 될 법한 먼 거리다. 이야기에 빠졌는지 아이들은 건너지 않았다. 육중한 트럭이 횡단보도 앞에 천천히 멈추어 섰다. 그제야 아이들은 즐겁게 그곳을 건너가는 게 아닌가.

 

감탄과 부러움이 가슴에서 솟아났다. 선진국의 본모습이란 생각도 났다. 며칠간 만난 꽁초 하나 없는 거리가 더 이해되었다. ‘우리는 언제 저렇게 할까하는 마음도 들었다. 선진사회는, 돈으로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일본도 예전에는 교통 등 기초질서가 엉망이었는데, 1964 도쿄 올림픽을 치르며 바로잡았단다. 세미나 간 때가 일본이 올림픽 후 20년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는데, 88올림픽이 30년도 더 지난 지금의 우리와 대비된다. 일본은 올림픽을 더 잘 활용했다 싶다.

 

조건반사처럼 저절로 택시 기사에게 손 인사를 하며 지날 때의 심사. 온 세상이 밝게 다가오는 순간이라 할까. 코로나 팬데믹으로 드리워졌던 어두운 장막도 걷히는 것만 같다. 살맛도 난다. 어떤 기업직원들이 한때, ‘기본의 실천이란 문구를 작업복에 새기고 일했다. 사실 택시 기사는 교통법규의 기본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기쁜 걸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기본이 덜된 것은 아닐까.

 

다시 출발하는 택시를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어선다. 문득, “오늘 보석을 만났어!”하고 마음의 추임새가 사방으로 퍼져가는 듯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행위가 보석으로 보이는 것은, 내 마음 눈이 잘못된 탓일까. 아니면 일그러진 초상(肖像)의 우리 사회이기 때문일까. 신호등 있는 간선도로 횡단보도다. 한 우회전 차량이 보행자인 내가 다 지나가고, 보행신호등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간다. 역시 기분이 좋다.

 

기본과 상식이 바로 선 보석들을 만난 기쁨이 희망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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