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수첩 내지를 갈아끼우며 [초회 추천작]

보니별 2006. 8. 19. 11:56
 

[초회 추천작]


                             수첩 내지를 갈아 끼우며


                                                                                            강 길 수(姜 吉 壽) 


새 해 첫 토요일.


시간 여유가 나 지난해의 수첩을 정리하였다. 3년 전까지 직장에 다닐 때는 매년 지급 되는 회사 수첩을 사용하였기에, 해가 바뀌어도 별다른 수첩 정리가 필요치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을 시작하고부터는 매년 지급되던 수첩도, 거래처나 상공회의소 같은 기관들에서 선물로 주던 수첩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궁리 끝에 내지(內紙)를 갈아 끼울 수 있는 수첩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 첫해에 해가 바뀌어 내피를 바꾸려 문구점에 들려 맞는 내지를 구하려 하였으나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쓰지 않고 두었던 수첩의 내지를 오려내어 사용하자는 것이다. 지난날엔 선물 받아 남들도 주고 아내도 쓰고 했지만, 몇 권 남아 있던 쓰지 않은 수첩을  버리기도 뭐해 그냥 두었었다.


연도만 지났을 뿐, 쓰지 않아 새것인 옛 수첩에서 내지 부분만 잘 오려내어 크기를 잘라 맞추고, 홀더 구멍을 맞게 뚫어 갈아 끼우면 근사한 새 수첩이 된다. 용지 크기를 맞추는 작업과 특히 홀더 구멍을 일정한 간격으로 뚫는 작업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쓰던 내지 몇 장을 새 내지위에 올려놓고 홀더 구멍을 연필로 새 내지에 그린 다음, 그 간격에 따라 펀치를 맞춘다. 다음으로 내지를 펀치에 밀어 넣을 때 일정한 깊이만 들어가도록 종이를 접어 펀치에 끼우는 등의 준비를 한다. 마지막으로 적당한 두께의 내지를 펀치에 넣고 신경 써 작업하면 된다.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작업을 마치면 새것에 비해 그리 못하지 않는 쓸모 있는 새 수첩으로 변신한다. 더구나, 외피는 그 동안의 손 때깔이 나서 더 애정이 가므로 가치로 보면 새것의 그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수첩의 내지를 바꾸어 쓴 것이 금년이 네 번째다. 수첩으로부터 다 쓴 내지를 빼내 겉표지를 붙이고 철하여 보관하게 된 것이 세권이며, 올 수첩에는 네 번째 내지가 갈아 끼워졌다. 그러니까 원래 수첩에 있던 내지를 제외하면, 다른 쓰지 않은 수첩의 내지를 갈아 끼운 것이 세 번째다. ‘삼 세 번’이란 말이 있듯이, 두 번 동안은 그저 버리기 아까운 오래된 사용 않은 수첩을 다시 사용하는 알뜰함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오늘 그 세 번째로 내지를 바꾸는 작업을 하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1년이란 세월이 가면, 캘린더도 바꾸고, 망년회나 송년회를 하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 해를 보내며 마무리 짓는다. 수첩을 바꾸는 것도 그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냥 수첩을 새 수첩으로 바꾸지 않고, 헌 수첩에다 내지만 사용 연도가 지난 옛 수첩에서 오려내어 다시 끼워 사용하는 내게 있어서는 수첩 내지의 교환이 뭔가 각별한 뜻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우선, 지난 일요일 등산을 갔을 때, 깊은 계곡에서 본 대나무 군락지의 푸르고 큰 대나무가 생각났다. 어떤 것은 직경이 한 뼘 정도는 되어 보일 정도로 굵고 튼튼하게 자란 대나무를 보고, 모두들 탄성을 지르던 장면이 떠 오른 것이다. 속이 빈 대나무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도 비바람에 잘 견디며 자라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저 대나무 마디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그 때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 수첩 내지를 바꾸면서 나는 내 삶의 또 한 마디를 맺는 것이다. 만일, 대나무에 마디가 없다면 조금만 강한 바람이 불어도 쪼개지며 넘어져 말라버려 죽을지도 모른다. 송년회에 참석 하고, 한 해의 캘린더를 넘기고, 수첩 내지를 바꾸고 하는 등 연말연시의 내 모든 일들이, 대나무처럼 더 푸르고 튼튼하게 내 삶을 가꾸는 삶의 마디가 되기를 바랐다. 그 삶의 마디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이웃과 나눔으로 맺는 마디란 생각이 들었다. 그 것은 정리 정돈, 환경미화, '아나바다 운동'과 같은 자원과 물자의 절약, 품질개선, 불우이웃 돕기, 환경 보호와 개선 같은 구체적인 나눔의 이웃사랑으로 이어지는 길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여, 이 수첩은 내 시간과 노력, 재능과 돈을 이웃과 자연 환경에 나누어줄 줄 아는 '나눔의 마디'가 된 내 소중한 보물이란 마음이 되었다.


나는 새로 내지를 갈아 끼운 수첩을 가슴에 안고, 이 새해의 벽두에 수첩에게 다짐해 본다.


"네 외피가 헐어 못쓰게 될 때까지 아니, 내 삶을 다할 때 까지, 해가 바뀔 때 마다 네 내지를 갈아 끼우며, 내 삶의 마디를 하나하나씩 푸르고 튼튼하게 '나눔의 마디'로 가꾸어 가리라."고…….


 

 <에세이 21 > 2005.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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