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 날 피어난 코스모스와 봉숭아
강 길 수
초복 날이라며 삼계탕이라도 해야 한다고 걱정하면서도, 웬 일인지 오늘은 순순히 따라나서는 꽃동무(아내)와 함께 의아한 기분으로 조금은 늦은 오후의 양학동 등산로 등산을 나섰다.
전엔 늘상 함께 등산을 다니던 꽃동무가, 무슨 의료기라는 상표를 붙인 전기메트 장치 홍보관의 무료 시연(試演)에 아는 사람과 가끔 가고 나서부터는, 낭군님의 간곡한 부탁도 뿌리치며 등산을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장마로 몸이 무겁다며 날씨 좋은 날 함께 가자는 내 제의를 선뜻 받아주었으니, '모를게 여자야...'라는 생각을 내 잠재의식은 아마도 틀림없이 했을 것이다.
아무튼 오래 만에 비록 자칭 우량아급(?) 꽃동무이지만, 둘이서 함께 나서는 조금 늦은 오후의 양학동 등산로 등산길의 내 기분은, 가을 날씨를 방불할 정도로 시원한 초복 날의 쾌청한 날씨보다 더 좋았다.
한데, 이게 어찌된 행운인지 입구 쪽 고가도로 옆 길섶에 아름다운 철 이른 코스모스가 봉숭아와 함께 잘도 어울려 활짝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네!"하고 감탄하자
꽃동무는 말했다.
"요즈음은 철이 따로 없어요." 라고.
더구나, 견공들이 인간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 생명을 제단에 바치는 이 초복 날에... 일찍이 내 기억엔 코스모스와 봉숭아가 함께 저렇게 잘도 어울려 피어있는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오후 네 시 반경의 빗겨선 햇살을 받으며, 활짝 핀 코스모스와 봉숭아가 함께 어울려 바람에 살랑대며 춤추는 모습... 그 것은 차라리 찬란함으로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철 이른 하늬바람의 시원함을 만끽하면서 야산의 산등성이로 난 등산로를 따라 걷는 동안, 내 시야엔 장맛비로 보드랍게 자라며 씻기고 또 씻겨서 순록(純綠)의 색깔로 순결하리만치 정화된 정갈한 풀과, 그 위로 버티고 서서 푸른 하늘에 환호하는 나무들의 모습과 그리고, 조금 전 본 코스모스와 봉숭아의 모습이 서로 어울리면서 찬란하게 각인되었다.
'살아있음의 기쁨과 더뷸어 살아감의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코스모스가 일찍 피면 어떤가? 저렇게 봉숭아와한데 어울리니 저리도 아름다운 것을... 그러기에, 철 이르게 하늬바람도 이렇게 시원하게
축복하지 않는가?'하는 마음의 소리도 들렸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라 '환경'이라 불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며, 나아가서는 지구란 행성과 태양계, 은하계, 우주의 모든 존재와,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모든 마음의 존재를 포함하는 것이란 가당찮을 생각도 들었다.
짙푸른 녹음은 시원한 하늬바람에 살랑 살랑 춤추며, 계속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기분 속에 오래 만에 꽃동무와 함께 간 오늘 초복 날의 짧은 등산... 그 것은 수많은 견공(犬公)들의 희생 때문인지 내겐 오래 만에 등산길을 함께한 꽃동무와, 철 이른 코스모스와 봉숭아, 오랜 장맛비로 씻기고 씻겨 차라리 정결한 푸른 녹음과, 폐부 깊이 스며드는 상쾌한 철 이른 하늬바람과 그리고, 내가 하나 되어보는 값진 경험을 주었다.
코스모스와 봉숭아야! 고맙다.
하늬바람아! 너도 고맙다.
- 2003. 7.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