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보니별 2006. 8. 15. 15:35
                          

                                         강   길  수




비가 오고 있는 대지의 모습은 우리를 순수하게 한다. 정갈하게 가꾸어진 잔디밭 위에 한 줄기의 소나기가 내릴 때. 작은 연못 위에 빗방울이 떨어져 무수히 파문 (波紋)지며 물기둥이 솟을 때. 연록으로 물든 봄의 산야에 보슬비가 내릴 때. 비는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한다.


어느 비 오는 가을날, 낙엽 깔린 숲 속에서 난생 처음 알게 된 소녀가 열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리자, 비만 오면 비통에 잠기던 다정했던 옛 벗의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게 될 때. 여행길의 차창에 빗줄기가 흐를 때. 그리하여, 문득 지난날의 일들이 영화 장면처럼 확 되살아나고, “아! 나는 바보였다!”라고 후회하게 될 때. 흐르는 빗줄기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비는 쉴 새 없이 대지를 두드린다. 대지는 문을 열고 생명은 눈을 뜬다. 한 포기의 방울꽃이 함초롬히 비에 젖어 있을 때. 밤새껏 내리던 비는 어느새 멎어 버리고, 산뜻한 새 아침의 햇살은 터지도록 맑고, 순결한 방울 소리가 온 아침에 퍼질 때. 어제 내린 비는 기묘하기만 하다.


비 온 후의 깔끔하고 순결한 생명의 대지, 온통 맑고 푸른 하늘, 신선한 공기, 청아한 새소리‥‥‥. 이 모든 것은 신비로운 비의 작업이다.


‘비가 있는 대지 축복 받은 곳, 생명의 고향.


비가 없는 대지 버림 받은 곳, 황량한 사막.


비는 대지의 생명소(生命素), 대지의 혈액(血液).’


비는 혈관을 따라 흐르며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제거한다. 대지는 싱싱하고 온통 푸르다.


골고타의 언덕 위에 암흑이 뒤덮고 비가 내릴 때. 거룩한 빗방울 방울 성혈(聖血)이 되어 온 세상을 씻어 내리고, 순교자의 붉은 피로 연연히 이어 왔으리니. 비는 거룩한 사랑의 상징, 영생(永生)의 효시.


비는 내려야 한다.


사랑의 비는 내려야 한다.


너의 마음에도, 나의 마음에도,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도‥‥‥.


비는 내려야 한다.


공해로 질식되는 자연을 씻어주고, 기계와 정보와 돈의 노예로 전락하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독선과 아집과 이기와 그릇된 사상과 무관심을 모두 씻어버리고, 맑고 순수한 영혼이 숨쉬는 대지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진노의 대왕 폭풍우가 되어 혼돈의 현대에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한다. 더 격렬한 ‘노아의 홍수’가 필요한 세태(世態)다.


장마철은 와도 참 비는 내릴 줄 모르는가? 비를 그리는 내 마음 어둡고 내가 찾는 맑은 동공(瞳孔)들은 어디에 있는가?


비는 우리를 기다리게 한다.


대지는 갈증으로 신음하고, 곡식은 말라죽을 때. 농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때. 비는 끈기 있는 인내심을, 사심 없는 맑은 마음을 요구한다.


비는 또, 우리를 당황하고 슬프게 한다. 폭풍우가 노도(怒濤)보다 등등한 기세로 대지를 삼켜 버릴 때. 갈증에 신음하던 대지는 홍수에 휩쓸리고, 무수한 수재민이 생길 때. 비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느 덧 홍수의 상처도 아물어 가을을 재촉하는 단비가 내릴 때. 비는 비로소 기쁨을 선사한다. 대지와 생명을 사랑하는 비는 온 누리에 영그는 열매와 곡식이 자신의 분신(分身)이란 것을. 그리고 결코 비는 인간들의 이기, 자만 독선, 아집, 탐욕, 분노, 나태‥‥‥ 이런 것들과는 영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한다.


비는 전능하신 분의 자비로운 용서의 선물이다. 구름으로 승화한 빗방울은 바람 타고 대지를 살피다가 필요한 곳곳에 내린다. 비는 태초부터 대지에 내린다. 뭇 생명을 발아시키고, 양육하며, 이물을 씻어 내린다.


비는 대지의 혈액, 그 기묘한 작업을 계속한다.


비가 오고 있는 대지의 모습은 우리를 순수하게 한다.   




*** 총각시절 어느 8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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