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송사리낚시

보니별 2006. 8. 23. 14:10
 

송사리낚시

                                                    강길수(姜吉壽)


 가운뎃손가락보다 큰 송사리가 낚시에 매달려 파닥인다. 물방울이 얼굴에 튀긴다. 몸부림치는 송사리를 왼손에 감싸 쥐고 낚시를 뺀다. 잘 빠진다. 송사리가 이젠 반갑지도 않다. 어머니 반짇고리에서 큰 바늘을 훔쳐 만든 미늘 없는 밥풀미끼 낚싯대를 담그기만 하면, 그 때마다 꾀도 없는 놈들이 잘도 낚이기 때문이다. 벌써 일곱 번째 놈이다. 텔레비전에서 낚시꾼이 대어를 낚는 장면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어릴 적 고향 냇가에서 송사리낚시를 하던 어느 날의 내 모습이다.

 그 후부터 나는 낚시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날, 낚인 송사리를 왼손에 쥐었을 때 떠오른 생각이 낚시에 대한 취미를 잃게 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다음에도 어쩌다가 벗들과 야외놀이에 함께 가면, 그들의 권유로 내키지 않는 낚싯줄을 드리우기도 했었지만, 조금 후엔 그만 두고 만다. 그런 날엔 낚시질보다는 낚시꾼들이 더럽힌 주위환경정리나, 음식물준비 등을 찾아 하곤 하였다.

 낚인 송사리들은 바로 물 담은 깡통에 넣어졌다. 한 마리, 두 마리 깡통속의 송사리들은 늘어나고, 시간은 몇 시간씩 금방 지나갔다. 잡힌 송사리들은 한두 마리씩 죽기도 한다. 산 놈들을 골라 집에 와 헌 유리됫병이나 헌 양은그릇 같은 것들에 담아두고 길렀다. 물만 갈아주며 기르는 것이다. 며칠 안가서 송사리는 다 죽고, 나는 다시 벗들과 냇가로 나가곤 하였다.

 텔레비전에서는 큰 바닷고기와 낚시꾼이 한판싸움을 벌이고 있다. 낚시꾼은 재미로 즐기고, 고기는 목숨이 걸렸다. 어릴 적 송사리낚시 장면이 오버랩 된다. 사람들은 왜 저런 잔인한 낚시질을 좋아할까? 자기 생업과 관계없이 다른 생명들을 죽이는 일이 정말 기쁨일까? 무슨 잡기[採集, 捕獲]나 낚시, 사냥, 서리 등의 구실을 단 놀이와 취미, 스포츠, 또는 장난과 실수로, 얼마나 많은 곤충과 동물과 미생물과 식물이 제 삶을 다 살지 못하고 희생되어 죽어갈까. 사람은 자기의 ‘유희(遊戱)욕구충족’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죽일 이유와 권리와 자격을 정말 가지고 있을까? 종교들의 가르침대로 과연 사람은 천상천하에서 가장 귀하고, 자자손손 번성하기위해 만물을 정복하고, 지배해도 되는 것인가? 사람에게 이성(理性)과 지혜, 사랑과 자비, 도(道)와 선(仙)과 같은 것들은 왜 있는가? 등등의 갖가지 의문의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생각은 더 이어졌다. 생명들의 생존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살기위하여 먹잇감을 죽이거나 취하는 일은 그들의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 것은 아직까지 푸른 별 지구 생태계의 보편질서이니까. 그러나 내가 살기위해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이 엄연한 명제(命題)는 다른 생명체를 먹으며 살아야하는 생명들의 가장 큰 슬픔, 즉 생존비극임에 틀림없다. 만일 생명의 주관자가 있다면, 그는 “사람아! 너도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될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지 않을까.

 사람이 생명체를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먹이사슬이나 약육강식이란 개념으로 생명을 죽이는 일을 정당화만 해야 할까? 만물의 영장(靈長)이 사람이기에, 그의 지성은 자기실존의 비극을 해결하기위해 쓰라고 주어진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유전공학기술, 나노기술 등 과학기술의 궁극목표는 바로 이 명제의 해결에 두어야할게 아닌가. 그래야 ‘지성적 존재’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바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선, 음식을 먹을 적마다 고마워하자. 종교의식들이 나타내듯, 이웃을 위해 무엇이라도 내어놓는 연습도 해보자.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 나아가 삼라만상을 사랑하도록 힘써보자. 생명 앞에 겸허하자! 하는 상념들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헷갈린다. 온통 안개 낀 세상 같다. 답답하다.

어릴 적에 송사리 낚시를 하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더 선명해진다.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하다. 송사리가 왼손 안에서 요동친다.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림없다. 송사리가 손아귀를 빠져나가기엔 쥔 내 손이 너무 힘세고 영악하다. 송사리가 파르르 떨다가 이내 조용해진다. 송사리 몸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온다. 송사리에게 더 없이 미안해진다.

 내 낚시에 찔린 입이 얼마나 아플까. 졸지에 영문모르고 당한 엄청난 일에 얼마나 놀랐을까. 행복했던 물에서 강제로 끌려나온 괴로움은 또 얼마나 클까. 목은 얼마나 마를까. 나는 왜 이렇게 잔인할까. 여러 생각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찔하다. 멍하다. 낚시재미가 싹 사라진다. 눈가가 촉촉해온다.

  온 몸의 촉각(觸覺)들이 왼손으로 모인다. 송사리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느낀다. 다행이다! 고맙다! 그러자 여태 보이지 않던 아름다운 새 세계가 확 나타나는 것만 같다. 얼른 왼손을 냇물에 담근다. 손아귀의 힘이 저절로 풀렸다.   

 “내가 만일 송사리라면?” 하는 생각이 어디선가 퍼뜩 들어서였다.

 송사리가 춤추듯 살랑살랑 헤엄치며 냇물 속으로 돌아간다. 나는 쌕 웃는다.

 어릴 적 그 날, 송사리낚시는 그래서 참 기뻤다.




*  「에세이 21」 2006 가을호 

*  ( '보리수필' 창간호 2006.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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