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버들피리

보니별 2006. 10. 29. 21:40
 

                                              버들피리

                                                                                     강길수(姜吉壽)


그대!

이곳엔 백목련 꽃은 사라지고, 자목련 꽃도 거의 다 집니다. 거리의 가로수 벚나무엔 절반정도의 꽃만 덜 지고 남아 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엔 제법 연녹색의 푸른 봄빛깔이 감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제 간 양학동 산엔 진달래가 지고 있어 섭섭하기는 했지만, 한 편으론 산(山)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조금 먼 곳에서 보일 땐, 하얀 조각구름이 산허리를 감돌아 나타날 때의 모습이라고나 해야 할 만큼, 낮은 야산의 허리를 하얗게 감싸며 수놓고 있는 산에 핀 산벚꽃……. 한 곳에 핀 꽃은 얼마나 화사하고 화려해 보이는지! 일부러 그 앞으로 가 잠시 넋을 잃은 듯 온갖 시름 다 잊고 아름다움에 취하고, 냄새도 맡아보고, 품에 안겨도 보았습니다. 봄이 찬란함은 봄꽃이 거기에 그렇게 있기 때문임을 알아채는 기쁨도 참 커다란 행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대!

오늘 오후엔 꽃동무(아내)를 졸라 쑥 뜯으러 이십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진전리’에 갔습니다. 어제 산에서 알아챈 봄을 더 느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진전리는 마치 고향과도 흡사한 산골이어서 내가 가기를 퍽 좋아하는 곳입니다. 산골짜기를 막아 만든 ‘진전지’란 저수지가 있고, 그 안쪽에 위치한 진전리는 대여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두메산골입니다. 이차로 포장도로가 몇 해 전 개통되었지만, 오염이 거의 되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봄이면 냉이를 시작으로 쑥, 돌나물, 돌미나리를 뜯고 계핏잎도 따며, 초여름엔 산딸기에 오디도 따곤 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자리 잡고 쑥을 뜯다가 문득 그대의 ‘피리’ 얘기가 생각나,  "그래.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어보자!" 하고 맘먹었습니다. 둘러보니 버들강아지 나무는 없었으나, 막 새 잎이 돋으며 물 오른 빛이 역력하여 피리 만들기에 적당한 물버들이 있었습니다. "옳지! 됐다." 생각하곤, 작은 가지를 조금 잘라 실로 오래 만에 버들피리 만들기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중학 이학년 때 고향을 떠난 후 처음인지도 모를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지 않고 금방 버들피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가녀린 고운 소리가 나기위해서는 피리가 적당히 가늘고, 길이도 짧아야 하는 경험이 금방 되살아났습니다. 적당한 길이의 껍질에 뱅 돌려 칼자국을 내고, 그 부분 껍질을 돌려 대와 겉돌게 이격시킨 다음 껍질을 빼냈지요. 다음엔 떨림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기억해 내곤, 갈라지지 않게 적당한 힘으로 한쪽 끝을 납작하게 하고 조심 조심조심 겉껍질을 칼로 깎아냈습니다. 드디어 버들피리가 완성되었습니다.

들뜬 마음과 기대로 버들피리를 입에 넣고 불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 일인지 소리가 나질 않지 뭡니까. 옛 기억을 되살려 떨림판 끝부분을 앞니로 약하게 잘근잘근 씹어서 부드럽게 한 후 다시 불어보았습니다. 그래도 소리가 나질 않았습니다. 다시 옛날처럼 떨림판 부분을 잘 살펴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떨림판 한쪽 끝 부분이 예상대로 조금 잘려 나간 것을 찾아냈습니다. 쑥 뜯느라 무뎌진 칼날이어서 겉껍질을 베어 낼 때 무리한 힘이 가해져서 그럴 것임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망설일 것 없이 이번에는 맞은 편 끝부분에 더 조심하여 떨림판을 만들었습니다. 다시 불자,

“삐, 삐이…, 삐…, 삐삐삐…….”

하고 그리웠던 소리가 났습니다. 실로 오래 만에, 그 옛날 소년시절의 버들피리 소이를 다시 듣는 귀한 감격의 순간이었지요. 꽃동무에게도 하나 만들어 주어, 함께 버들피리를 불었습니다.

“졸졸. 졸졸졸…, 졸졸졸…….”

“삐, 삐이…. 삐… 삐삐삐, 삐삐삐, 삐이…….”

맑게 흐르는 개울물소리와, 꽃동무와 내가 부는 버들피리 소리, 그리고 짝을 부르는 새소리가 한데 어울려 졸지에 진전리의 개울가엔 생음악회가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음악회의 피리 연주자가 되었고, 개울물은 배경음악을 연주하고, 새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혀끝에 느껴지는 물 버들의 상큼한 봄맛과 코로 맡아지는 향긋한 물 버들과 쑥의 봄 냄새 속에, 우리 부부는 열심히 버들피리를 합주하였습니다. 그 소리는 금방 우리를 저 맑은 자연의 일부가 되게 해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청아한 버들피리 합주소리 속에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시면서, 봄볕에 알맞게 잘 자란 쑥을 기쁘게 한포기한포기 뜯었습니다.

진전리의 생음악회 연주는 여느 음악회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 더 아름답게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그 화음은 아름다운 산과 흐르는 물, 맑은 하늘, 찬란한 봄 꽃, 가슴 가득히 마시는 공기, 풋내 그윽한 쑥, 봄 새 등 온 누리와 꽃동무와 내가 바로 하나이자, 함께 살아있는 자연의 세포 같았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결같이 살아있는 내 세포들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채는 새로운 기쁨은 형용할 수 없는 행복 속으로 나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대!

이 행복을 고스란히 내 맘에 실어 그대에게 보내오니, 그대 맑은 마음으로 그 옛날 버들피리를 힘껏 불어 보십시오. 그리고 ‘버들피리의 행복’을 가슴 가득히 안아 보십시오!

그리하여, 이 봄은 그대 말씀처럼 우리 함께 ‘순둥이 소년, 소녀’가 되어 봅시다.

예쁜 순둥이 소녀 그대여…….


 

( '보리수필' 창간호 2006.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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