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학동 등산로[1](진달래그네)
강길수(姜吉壽)
지난 일요일, 등산 겸 봄나물 뜯으러 가자는 내 제안에 아내는 무슨 이유를 대며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조금 미웠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가까운 ‘양학동 등산로’에 등산을 갔다.
양학동 등산로는 도심과 이어져 있는 야산의 능선으로 연결된 곳이다. 가는 방향에서 볼 때, 왼쪽 골짜기엔 ‘양학동’과 ‘학잠동’ 주민들의 보금자리와 근린생활 시설들을 품고 있다. 또, 오른쪽 골짜기엔 ‘용흥동’ 주민들의 보금자리와 근린생활 시설들을 품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 사는 주민들에겐 마치 어머니의 품과도 같이 따사로운 산이다.
가는 길에 보이는 거리의 벚꽃은 만발할 대로 만발해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절개지 축대위에 샛노랗게 핀 개나리꽃은 꽃 사이로 파릇파릇 새잎이 함께 돋아 생명의 기쁨을 한껏 수놓고 있다. 입구 쪽 산기슭엔 복사꽃이 어찌나 정갈하게 활짝 피어 있던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결케 한다. ‘양학동 등산로’란 작은 팻말을 지나 쉬엄쉬엄 반시간쯤 걸어가면, 여기 저기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를 만난다. 벚꽃, 개나리꽃, 살구꽃 다 만나고 나서 만난 진달래가 웬일인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어린시절……. 우리 개구쟁이들은 참꽃(진달래)꺾으러 참 많이도 다녔었다. 이산, 저산 양지바른 곳에 핀 참꽃을 입술이 파랗도록 따 먹으며 한 아름 꺾어 와 물병에 꽂곤 하였다. 꽃 꺾으며 노는데 정신이 팔려 점심시간을 걸러버리고 돌아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동네 어른들이,
“야 이놈들아! 산에 돌아다니면 미구가 잡아먹는다!”라든가,
“참꽃 꺾는 애들은 문둥이가 잡아간다!”는 등의 무시무시한 겁을 주어가면서까지 꾸지람을 하였다. 그래도 이튿날, 우리개구쟁이들은 어김없이 또 진달래 찾아 산으로 뛰어다녔다.
이어서 반시간을 더 가면, 두 번째 간이 체력단련장을 만난다. 평행봉, 역기, 매달리기 경사판 등 시당국에서 설치한 몇 가지 운동기구들과, 어느 고마운 분들이 갖다 놓거나 설치했을 훌라후프, 서까래 뜀틀, 그네가 그 것들이다.
처음 내가 이 시설들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뛰어간 곳이 그네이다. 그네가 매어진 곳은 산의 경사가 진 곳으로 아래쪽엔 상당히 높았으나, 그런 것을 의식하기 전에 벌써 그네를 타고 있는 자신을 한참 후에야 알아챘었다. 마음은 어느새 어린시절로 돌아가 버리고, 그네 옆에도 아래도 진달래가 활짝 피어 나를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홉 집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산골 우리 마을엔 초파일이나 단오절 날, 동네의 큰 소나무에 그네를 매어 뛰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 동네 사내아이들은 진달래 아름다운 어느 따뜻한 봄날, 의기투합해 동네 뒤편의 소나무에 그네를 매어 타며 놀기로 했다. 당시의 우리 동네 그네는 짚을 땋아 그넷줄을 만들어 사용 하였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들이 세 가닥, 또는 네 가닥으로 그넷줄을 땋아 만드는 광경을 익히 보아 배워둔 터였다.
드디어 우리들은 각자 집에서 얼마만큼의 짚들을 가져와 모였다. 짚을 추려 다듬고 물에 잠시 담근 다음, 녹녹해진 짚으로 굵은 밧줄을 엮기 시작했다. 세 가닥으로 엮는 그넷줄이다. 먼저 새끼를 가늘게 꼬기 시작하여 점점 굵게 하면서 어느 정도 굵어졌을 때, 세 가닥으로 나누어 짚을 먹이며 굵게 땋아가는 작업 과정이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척척 분업이 잘 되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씨름한 후 작업은 끝났다. 살펴보니 어른들의 그 것만큼 매끈하고 깔끔하지 못해 울퉁불퉁했지만, 우리 작은 손으로 엮어낸 것 치고는 아주 훌륭한 짚 그넷줄이 되어있다.
이젠 그넷줄을 큰 소나무의 튼튼한 가지에 잘 매는 것이 문제였다. 잘못매어서 풀어지거나 떨어지면 작업의 허사는 물론, 그네 뛰다 다칠 위험까지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들도 먼저 쉽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내가 먼저 올라가겠다고 말하고 나무에 기어올랐다. 이윽고 그네를 맬 나뭇가지에 올라, 뒤따라 오른 친구들과 함께 우리가 만든 그넷줄의 양 끝을 올렸다. 모두가 지혜와 힘을 모아 그네를 매는데 성공하였다. 나무꼬챙이를 만들고, 새끼를 꼬아 발판을 만들어 꽂으니, 드디어 우리들의 그네는 완성되었다.
우리들은 감격하며 마치 봄 나비처럼 가볍게 그네를 타고 날았다. 우리들이 만든 그네이지만, 두 명이 마주보며 쌍그네를 타도 끄떡없었다. 우리보다 더 어린 애들이나 여자아이들이 그네를 탈 때, 우리는 더 기뻐들 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이 분홍 진달래를 입에 물고 그네를 뛰는 예쁜 모습은 봄 나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이 그네 이름을 ‘진달래그네’로 하자!”
그 날부터 우리 동네 뒷산 언저리엔 아이들의 그네 타는 소리와 웃는 소리와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우리들은 스스로 만든 그네를 타며 참 행복했다. 여럿이 모여 함께 이루어내는 행복을 맛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작은 마을의 머슴애들은 서로 싸운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높지 않는 작은 그네였지만, 참 대견하고 아름다운 ‘진달래그네’의 추억이다.
“아저씨 그네 잘 타네요!”하는 어린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네가 비탈진 아래쪽을 향했을 때, 그넷줄이 끊어지거나 떨어지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하지만 그네 옆으로, 아래로 활짝 핀 분홍 진달래가 함께 뛰자고 여전히 유혹하고 있다. 진달래유혹에 위험하다는 생각들은 다 사라지고, 그 옛날 입에 분홍진달래를 물고 있는 아이라도 된 듯, 힘차게 또 힘차게 그네를 뛴다.
어느새 나도 진달래그네 되어 봄을 날고 있다.
( '열린 포항' 2007.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