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양학동 등산로[2](비밀)

보니별 2006. 11. 25. 12:12
 

                              양학동 등산로[2](비밀)

                                                       

                                                                                                      강길수(姜吉壽)

  

 유월 첫 주 휴일. 싱그러운 생명으로 둘러싸인 축복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오후엔 삼주 만에 '양학동 등산로'를 찾았다. 웬일인지 아내도 순순히 동행 길에 올라 기분이 좋다.

 삼주 전엔 끝물 아카시아꽃잎이 입구 쪽 오솔길에 많이도 떨어져 있었다. 아카시아꽃잎은 어린시절 봄, 우리 집 마당에 아침이면 하얗게 떨어져 있던 감꽃을 연상케 했었는데, 오늘은 가끔씩 늦게 핀 하얀 찔레꽃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녹음은 우거져 생명의 기쁨을 한껏 뽐내고 있다. 얼마를 가니까 코를 찌르는 익숙한 냄새가 영일만 바다의 시원한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바로 밤꽃냄새임을 알아챘다. 그 어떤 꽃보다 더 생식(生殖)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밤꽃냄새다. 새들은 짝을 부르는 즐거운 노래를 메들리로 계속 불러댄다. 이 양학산 자락에도 드디어 사랑이 무르익을 대로 익었나 보다. 괜히 듣는 내 마음도 덩달아 들뜬다.

 쉿! 오늘은 비밀 하나를 말하고 싶다. 무슨 비밀로 할까. 양학동등산로 얘기를 하고 있으니 그 걸로 할까. 대단한 것도 아닌데 뜸 들인다고 핀잔 들을라. 그래도 사람들이 이 비밀 듣고 나면, 아마도 나를 '속물'이라고 놀려 댈 지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애라! 모르겠다. 똑바로 따지면, 세상에 속물 아닌 사람은 없을 테니 털어놓고 보자.

 중간에 조금 쉬면서 약 한 시간쯤 걸어가다 보면, 서쪽 나지막한 야산 능선 너머로 지곡 주택단지 아파트들의 위층들이 보인다. 그 너머로는 겹겹이 먼 산의 능선이 흐르며 하늘과 맞닿아 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다.  아침나절이나 한나절, 저녁나절, 나아가 계절에 따라 햇빛이나 계절에 맞춰 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우선 나무가 울창한 야산 능선 두 줄기가 계절마다 다르게 채색되며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그 뒤로 높은 아파트의 하얀 위층들과 붉은 지붕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자연과 인간세계가 하나처럼 다가온다.

 작년 어느 봄 휴일 날 아침나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산보하는 마음으로 지곡 주택단지가 보이는 부근을 걷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흘러, 그 곳 두 소나무 사이에 잠시 서서 서쪽을 바라보며 무심코 땀을 훔쳤다. 소나무가지 사이로 아파트 있는 풍경이 보였다. 가득 찬 봄의 신록들과 어울려 야산위로 드러난 아파트 위층들의 모습이 수채화를 보듯 그날따라 더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아파트 지붕 뒤에 있는 산의 한 능선에 어찌 보면 젊은 여인의 큰 젖가슴을 꼭 닮은 봉우리 두개가 있고, 그 왼편 더 멀리 뒤 능선에는 마치 할머니의 작고 여윈 젖가슴 같은 봉우리 두개가 더 있는 것이 처음으로 내 눈에 보였던 것이다. 나는 번갈아 가며 한참을 쳐다보았다. 참 이상했다. 왜 그토록 많이 지나다니고서도 오늘에야 처음 저 젖가슴의 모습이 보였는지? ‘사람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의 뜻이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졌다. 마음이 없어 있는 것도 못 보고 여태 다닌 ‘눈뜬장님’이 나인 게다. 얼마나 많은 사물들과 현상들을 내가 마음이 없어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을까…. 나는 속으로 마음먹었다.

 ‘저 가까운 앞의 것은 내 짝 아내의 젖가슴, 멀리 뒤의 것은 가신 내 어머님의 젖가슴으로 정하자. 이곳을 마음의 비빌 장소로 삼자. 모든 그리움을 꽃피우고, 또 달래는 곳으로 하자. 슬프거나 외로울 때, 아프거나 힘들 때, 상처 받았거나 절망할 때 찾아오자. 와서 짝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엄니의 작은 젖가슴에 얼굴을 묻어보기도 하자‘고….

 그 후 어느 날, 마침 동행한 아내를 그 곳에 불러 세우고는,

“저길 봐! 저 큰 봉우리 두개는 당신 젖가슴, 그리고 그 뒤 멀리 왼쪽으로 있는 작은 봉우리 두개는 하늘나라에 계신 울 엄니 젖가슴이야! 내 아이디어가 기발하지?" 했더니, 아내는 서방님을 두고,

“남자들이란 다 속물이지 뭐에요!” 하고 눈 홀기며 웃어넘기고 말았다.

  이리하여 나는 그 다음부터 아내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그 곳, 내 마음의 비밀장소를 지나 갈 때 자주 멈추어 서곤 한다. 거기서 하늘과 맞닿은 산 능선에 언제나 살아있는 아내의 젖가슴과 하늘에 계실 울 엄니, 내 유아시절의 그 따뜻하던 그리운 어머님의 젖가슴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얼굴을 묻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다. 사물의 실존과 내 생을 응시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면서 내 삶을 다시 여미곤 한다. 그 것은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의 비밀의식 곧, 자아 정화의식(淨化儀式)과 충전의식(充塡儀式)이기도 하다.

 오늘의 양학동 등산로 얘기는 하다보니 마치도 내 마음의 고해성사(告解聖事)같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은 골짜기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는데, 산딸기나무에 산딸기가 익어가기 시작하고 있어, 두어 개 따 먹어 보았다. 아직은 많이 시다.

 유월 초순의 산야가 참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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