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오월의 길목

보니별 2017. 6. 27. 02:19




 

                             오월의 길목

 

                                                                         강길수(姜吉壽)

 

   처음 보는 광경이다. 과자들이 춤을 추다니. 과자들의 춤사위가 신기해 금방 관객이 되고 말았다. 노란 과자들이 명지바람에 살랑살랑 춤추며 노래를 시작한다. 가사는 이와 같으리라.

 

    “어화 세상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묻지 마오, 묻지 마오, 그 모양이 뭣이냐고.

   억울하게 과자 되어 어찌 그리 사느냐고.

 

   만화방창 좋은 봄날 콩고물 과자 대수인가.

   나무 풀들 어울리니 기쁘고도 즐거운데.

   사람들은 바보같이 어울릴 줄 모른다네.

 

   숲속, 오월의 길목이다. 하늘에서 온 세상을 품어 안으려는 듯 많이도 뿜어댄 송홧가루 세례로, 가지에 달린 보송보송한 생강나무 새잎이 영락없이 노란 콩고물을 뿌려 만든 과자다.

   상수리나무들은 벌써 산허리에 신록바다를 연출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봄철. 주말이면, 우리 가족은 함께 이 산을 가끔 올랐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로라잉걸스와일더원작 초원의 집영향을 받아서였을 게다. 그때, 이 산은 조릿대나무가 사는 첫 번째 봉우리까지만 작은 오솔길이 나 있을 뿐이었다. 산 초입이 급한 경사길이어서 아이들이 오르기 싫어하면, 이런저런 유인책을 써 첫 봉우리까지는 언제나 올랐었다.

  일단 산봉우리에 오르고 나면, 어린 형제도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와 피어나는 새순과 봄꽃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이것은 조릿대나무, 그것은 상수리나무, 저것은 소나무다. 저쪽 큰 나무아래 분홍 꽃은 진달래꽃, 저 아래 길가 노란 꽃은 개나리꽃, 그 옆 가로수 흰 꽃은 벚꽃이란다. 그리고 저 멀리 강 너머 보이는 큰 공장이 아빠가 일했던 종합제철이다.’ 하는 식으로, 보이는 사물들을 아이들에게 공부시키듯 설명해주곤 했다.

  봄날 산길은 여럿이 걸어도 좋지만, 혼자서 걷는 게 제격이다. 나무와 풀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느낌도 나눌 뿐만 아니라, 뜻을 알아채고, 피어오르는 새싹의 기운을 오롯이 받아낼 수 있으니까. 어떤 이가 잘라낸 작은 조릿대나무막대 하나를 골라들었다. 사람들이 버린 휴지 등 썩을 수 있는 오물을 땅에 묻는 도구로 쓰기 위해서다.

   문득, 지휘봉을 든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 기분이 든다. 조릿대지휘봉으로 주위를 가득 메운 나무, 풀들을 연주자 삼아 봄노래를 연주하는 흉내를 내 본다. 나무를 슬쩍 건드리며 장난을 치고, 말도 걸어본다. 높은 하늘위로 봄 숲을 옮겨 놓아보기도 한다.

  돌아오는 길. 저 앞쪽에 한 어른이 아이와 무슨 손짓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조금 가까워지자 한눈에 아빠와 자식 사이임을 알았다. 백인 젊은 아빠와 세 살쯤 되는 사내아이다. 두 사람은 함께 무엇을 만들고 있다. 몸짓, 손짓을 섞어가며 아빠는 열심히 설명하고, 아이는 가까이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지랑이 같은 무엇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다. 더 가까이 갔다. 둘이서 만드는 것이 보이는 순간, 그 장면은 저절로 내 마음속 화폭에 동영상으로 찍혀 저장되었다.

  우선, 두 사람의 모습이 가관이다. 사람들이 오가며 밟아, 송홧가루와 흙이 뒤범벅이 된 길바닥. 약한 바람에도 먼지가 풀풀 인다. 개의치 않고 아빠는 퍼질고 앉았고, 아이는 일어섰다 앉았다 한다. 아이 엉덩이는 이미 흙 범벅이다. 손과 얼굴, 윗옷에도 먼지가 이리저리 발렸다. 아빠의 큰 손도 먼지가 듬뿍 묻었으며 팔뚝과 옷도 먼지투성이다.

  흙과 송홧가루에 짓이겨져 조금만 움직여도 먼지가 펄펄 날리는 솔가리. 솔가리를 손에 들고 흩날리는 먼지는 아랑곳없이, 새의 둥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산새가 둥지를 틀듯 진지하다. 다 만들자, 안에 솔방울 네댓 개를 넣어 둥지를 완성하는 게 아닌가! 둘은 환하게 웃었다. 아빠는 모두가 함께 살아내기에 늘 푸른 숲의 경이로움을 솔방울새알로 변신시켜, 갓 지은 솔가리둥지에 담은 것이다. 새알을 담은 둥지를 어린 아들의 마음속 품안에 안겨주어 부화를 기다리겠구나 싶었다.

  “반갑습니다!” 하고 내가 인사 하자,

  “안녕하세요?” 라고 젊은 아빠는 서툰 한국말로 받았다. 나는,

  “! 새둥지네요. 뷰티플!”하고 말했다. 아이는 뒤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아이의 생김을 보아 어머니는 한국인일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 옷 버렸다고 두 사람이 아이 엄마한테 혼난다 해도, 아빠와 아이는 괘념치 않을 게다. 아니, 저런 남편과 아이의 엄마라면 오히려 부자(父子)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줄 것이 아닌가.

   둥지 곁을 떠나오다 뒤돌아보았다. 웬일인지 아이와 아빠의 모습이 연록 숲과 닮았다. 아니 숲의 일부 같다. 아이의 손에 들린 솔가리둥지에 산새가 폴폴 날아드는 듯도 하다. 그 모습에 나는 여태 숲의 겉만 보고 살아왔구나!’하는 생각이 마음에 잦아들었다.

   어린 시절 산골에서 자라나며 숲과 그 안에 사는 생명들을 숱하게 보고 겪었다. 그런데도, 왜 저 외국인 젊은 아빠처럼 숲을 제대로 바라보고 느끼고 함께 살려하지 않았을까. 은연중에 숲은 늘 그 자리에 있고, 필요한 것을 사람들에게 무조건 내어주는 존재로만 배운 모양이다. 하여, 내 아이들에게 이러니저러니 숲의 겉모습을 말로만 했지, 그 안의 나무와 풀과 새와 생명들이 어찌 사는지 제대로 체험케 하지 못했다. 부끄럽다.

   하늘아래 온갖 것을 따지지 않고 받아들여 함께 살아내는 커다란 품을 가진 존재, 그가 바로 숲이다. 그 품안에서 생명들은 서로 연을 짓고, 서로 나누고,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기에 숲은 늘 푸르다. 숲은 모두가 어우러지는 고향, 우리가 닮아야 할 본()이다. 사람들의 길과는 사뭇 달라도, 너와 내가 따라 가야 할 길.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살기에 늘 푸른 길. 숲이 살아내는 길…….

   새잎이 온통 송홧가루 콩고물과자가 되어도 불평 않고, 명지바람에 덩실덩실 춤추며 오월을 영접하는 생강나무 사는 숲. 오는 이 누구나 어머님 품같이 감싸 안아주기에 메마른 마음 들켜버린 나는, 오월의 길목이 차라리 시리다.

 


       - < 수필미학> 2017.  여름호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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