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군불

보니별 2016. 12. 9. 00:53



                                   군불

                                                                                                         

                                                                                 강길수姜吉壽

                                                       

   버턴 하나 누른다. 곧 팬 도는 소리가 주방 쪽에서 들린다. 격세지감이 든다. 손가락 동작 하나가 지난 날 그 많던 수고를 대신하다니, 참 편리한 세상이다. 한데, 웬일로 버턴 누르던 손 너머로 고향집 아궁이들이 아련히 나타날까. 마음은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날 고향집 마당에 착륙하고 만다. 초겨울이다. 디딜방앗간을 꽉 붙잡은 듯 서있는 큰 감나무 머리엔, 주먹홍시 네댓이 첫추위에 떨고 있다.

   등 뒤에서 해가 서산에 추운 몸을 기대기 시작하는 시각. 부엌 처마에 어머니께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휘감아 오른다. 이때쯤, 아버지는 아랫방 가마솥에 쇠죽을 끓이기 시작하신다. 여물이 떨어진 날은, 어린 나를 부르신다. 아버지가 볏짚을 작두에 먹이시고, 나는 작두를 밟는다. 힘이 약해 잘 안 썰리면, 아버지의 오른손도 작두를 함께 누르신다. 작두날에 싹둑 몸이 잘린 짚은 비로소 여물로 변신한다. 한 존재가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제 몸이 짚처럼 잘리고 부서져야 되나보다. 아버지는 가마솥에 여물을 가득 넣고, 콩깍지나 등겨를 섞어 쇠죽을 안치신다. 그리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신다. 나도 아버지 곁에서 장작불 때는 일을 거든다. 장작불이 달아오를 무렵, 부엌 쪽에서 새 쌀밥 냄새가 날아와 빈속을 콕콕 후벼 판다.

   아버지는 불이 활짝 붙은 작은 장작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얘야, 이 불로 건넌방에 군불 좀 때 보거라. 조심해야 한다!”하신다. 장작불의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에워싸고, 매캐한 연기냄새가 코를 찌른다. 조심조심 빠르게 걸어 가, 건넌방 아궁이에 불타는 장작을 얼른 넣는다. 재빨리 소나무갈비를 넣은 장작위에 얹고, 삭정이를 갈비위에 올린다. 불이 붙는다. 굵은 삭정이를 충분히 넣고, 위에 가는 장작 몇 개를 엇갈리게 포갠다. 장작이 타오른다. 다행이다. 큰 장작과 자른 둥치나무 두어 개를 얹는다. 군불지피기 성공이다. 이어, 아버지의 부지깽이 불 추스르기가 뒤따르지만. 어린 날, 아버지를 사부로 군불때기기술을 이렇게 배웠다. 되돌아보면,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아버지의 군불 때기 도제徒弟였다. 사부 덕분에 제자는 아마도, 군불명장名匠의 경지에 올랐지 싶다.

   고등학교 겨울방학 때다. 삭풍이 산등성이에서 내리꽂힌다. ‘윙윙’, 나뭇가지를 훑어내는 바람소리가 시리다. 오늘은 어느 나무를 군불 감으로 할까 잠시 살핀다. 가파른 골짜기를 올라오느라 달았던 몸도 이내 으스스해진다. ‘옳지. 저기 죽은 오리나무 몇 그루가 있구나. 저걸로 하자.’고 마음먹는다. 오리나무는 불땀이 약해도 연기가 안나 군불나무로 좋다. 나무를 지고 나가기 편한 곳에 지개를 벗어 작대기로 괴어두고, 톱과 낫을 챙겨든다. 장갑 낀 손이 벌써 시려온다. 오리나무는 소나무나 참나무에 비해 톱질이 수월하다. 밑둥치에다 톱질을 시작한다. ‘쓱싹쓱싹톱질소리가 손 시린 냉기를 빼앗아 삭풍 등에 올라타고 골짜기를 헤엄쳐간다. 한 둥치, 두 둥치, 어느 듯 한지개가 다 되었다. 바를 매고, 잠시 앉아 이마의 땀을 훔친다. 무거운 통 오리나무 지개를 지고, 비탈길을 작대기 짚어가며 조심조심 내려온다.

   군불 때는 건넌방 가마솥에는 물이 가득 차있다. 데운 물은 식구들의 세수, 빨래, 목욕 등 씻는 곳에 두루 쓰였다. 따져보면, 건넌방에 때는 불도 군불이 아니다. 방을 덥히기 위해서만 때는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을 데우기 위해 때는 불에 덤으로 물을 덥히는 불은 고향에서는 군불이라 불렀다. 축에 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궁이 넷 중에 군불 때는 것은 건넌방 하나였다. 둘은 방데우기를 겸하는 밥솥, 국솥이고 나머지 하나는, 방데우기를 겸하는 쇠죽솥이다. 하여, 우리 집 아궁이는, 일석삼조 내지 사조의 역할을 해내도록 함께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한번 때는 군불로 쓸 물 덥히고, 방 데우고, 쓰레기 치우고, 나오는 재는 비료로 쓰는 폐기물 제로 구조다. 다른 아궁이들도 모두 같다. 이렇듯, 우리 선인들은 에너지 저소비와 고효율 이용이 몸에 밴 삶을 꾸려온 것이다.

   도시에 나와 사는 지금, 우리 집의 에너지 사용방식은 따로 시스템이다. 도시가스보일러의 버튼 하나 누르는 동작으로 방은 물론, 주방, 마루까지 군불을 땐다. 취사는 별도의 가스렌치로 한다. 시골 고향에 사는 동생네도 다를 바 없다. 프로판가스로 취사를, 기름겸용 화목보일러로 방, 마루, 주방의 군불을 땐다. 연료가 나무 또는, 기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재, 우리사회 대부분의 가정은 이와 비슷하리라. 취사와 군불을 함께 때던 시대에서, 따로 때는 시대로 빠르게 바뀐 것이다. 게다가 전기 냉난방도 겸하기도 하니, 에너지 다소비사회가 되었다.

   지구 온난화로 대표되는 현세의 기후 변화는, 인간의 화석연료 과다 사용이 원인이라 한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아니라, 공존의 대상으로 삼았던 우리네 선인들. 그들은 자연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로 살아냈다. 어린 날, 고향집 군불아궁이만 보아도, 선인들의 자연공생이 드러난다. 서구 문명이 지구촌을 휩쓸면서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인간의 과소비 행태는, 에너지 소비패턴도 함께 시스템에서 따로 시스템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사람의 과소비로 중병 든 생명의 어머니 지구, 그가 앓는 병고가 온난화와 재난으로 변신하여 도처에 널브러져 있다.

   답답한 내 마음은 오늘도, 옛 고향집 건넌방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 <에세이 21> 2016. 겨울호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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