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밥, 성체성사

보니별 2016. 12. 12. 16:48


                                                  , 성체성사

 

                                                                                                  강길수姜吉壽 

 

  초원에서 얼룩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평화롭다. 한쪽 키 큰 풀숲 속에서는 사자가 호시탐탐 망을 보고 있다. 잠시 후, 사자는 몸을 바짝 낮춘 포복자세로 숨어 살금살금 얼룩말떼에 가까이 다가간다. 얼룩말들은 아직 사자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사자가 포복을 멈추고 습격자세를 취한다. 티브이 화면이 클로즈업된다. 이윽고, 사자의 전력 질주가 시작되었다. 혼비백산한 얼룩말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친다. 뒤처진 얼룩말 한 마리가 그만 사자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사자는 저보다 덩치가 훨씬 큰 얼룩말의 뒷등에 올라탔다. 앞발과 입으로 얼룩말을 쓰러트리려 한다. 얼룩말은 뒷발로 사자를 차보기도 하지만, 역부족이다. 등가죽에 박힌 사자의 발톱과 이빨이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얼룩말은 쓰러졌다. 사자 가족들이 몰려든다. 운명의 장난인가. 처절한 고통 속에 얼룩말은 사자가족의 밥으로 생 죽임을 당하고 만다. 덕분에 사자 가족은 배불리 먹고, 더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동물의 왕국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본 사자의 얼룩말 사냥 장면이었다. 얼룩말의 일생은 사자가족의 몇 끼니 밥에 불과했던 것인가.

  사자는 참 잔인하게 산다. 살아있는 동물을 밥으로 잡아먹기 때문이다. 잔인하게 사는 존재가 사자 같은 포식동물 뿐일까. 따져보면, 다른 존재를 밥으로 먹어야 사는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들이 잔인하기는 매한가지다. 먹히는 자는 모두 죽어야 하니까 말이다. 어떤 이는, 식물을 먹고사는 초식동물은 예외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탈리아 피렌체 대학 스테파노 만쿠소 교수 같은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 밝혀지는 식물에 대한 연구결과는, ‘식물도 감정이 있다’고 증거들을 제시한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존재가 식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밥은 본질적으로 잔인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사자에게 잡혀 먹히는 얼룩말이나, 내가 먹는 밥알 하나나, 같은 고통 속에 먹는 상대를 위해 똑 같이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밥은 참 잔인한 것이다.

  우리의 삶, 아니 모든 삶이, 밥으로 인해 과연 잔인할 뿐이란 말인가. 사자 식구의 몇 끼니 밥으로 제공된 얼룩말의 일생이, 잡힐 때 겪어낸 고통과 생죽음의 희생이, 과연 무의미하게 끝나버릴까. 이른 봄 못자리에서 싹터, 여름 뙤약볕 논에서 자라나 가을에 열매 맺은 벼. 벼는 밥이 되기 위해 수확, 탈곡, 건조, 도정, 그리고 조리의 과정을  다 겪어내야 한다. 내가 밥으로 먹는 쌀의 일생이, 껍질 벗겨지고 열에 익는 고통과 생죽음의 희생이, 정말로 의미 없이 마감되고 마는 걸까. 지구 행성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진정 잔인한 희생만으로 점철되어 있을 따름이란 말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고, 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는 법이다.  입장 바꾸어 바라보면, 무엇이든 새롭게 보인다. 먹히는 얼룩말이나 밥의 입장 곧, 자기를 희생하여 먹히는 생명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는 것이다. 얼룩말은 사자를 위해 생명을 희생하였고, 벼도 나를 위해 생명을 희생하였다.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일…. 이보다 더 거룩한 일이 어디 있으랴. 하여, 밥은 또한 참 거룩한 것이다.

  희생되어 밥이 된 동식물들은 자기를 먹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얼룩말은 사자로, 쌀알은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윤회라 할지도 모른다. , 어떤 이는 생명의 순환이라고도 할 것이다. 암튼, 모든 먹이사슬이 이 같은 구조로 되어있음을, 우리는 태생적으로 알고 있다. 신생아가 저절로 어머니 젖을 찾아 빨 줄 알듯,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생명체는 본능으로 먹을 줄을 안다. 생태계는 전체를 아우르는 누군가에 의해, 밥이라는 고통과 죽음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는 시스템으로 설계되어, 운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삼라만상에 우연이란 없기 때문이다. 희생 곧, 고통 안에 죽어 밥이 됨으로써, 다른 존재로 부활하도록 주어진 우리네 삶. 이 잔인하고도 거룩한 삶을 우리는 대체 어떻게 알아듣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예수그리스도는 수난受難 전날, 성체성사聖體聖事*를 세웠다고 복음서가 전한다. 자기의 몸과 피를 제자들과 인류,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밥과 술로 내어놓는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교 교회들에서는 ‘미사’와 ‘성찬례’를 통해 오늘날도 끊임없이 성체성사를 행하고 있다. 성체성사를 묵상하노라면, 그 보편성과 위대성에 나는 그저 감읍할 따름이다. 생태계를 저리도 아름답고 찬란하게 존재토록 하는 밥,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 잔인하기에 되레 거룩한 생명의 법칙을 성체성사에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한솥밥을 나누어 먹는 이들이 식구가 되듯, 성체성사를 통해 나와 너, 그리고 모든 이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예수그리스도. 모든 실존을 성체성사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 한 몸 같은 참 생명의 공동체로 변화시키려는 예수그리스도. 그의 깊고, 높고, 넓은 통찰…. 그는 자신을 ‘내 몸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고 말하며 받아먹고, 마시라고 했다. ,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도 했다. 물론 신앙의 내용을 담은 말들이지만, 말 그대로 알아들어도 언제나 내 마음의 강은 짙푸르게 여울진다. 사람은 물론, 다른 생명들에게 자기 삶을 내어놓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푸른 메시지파동을 함께 싣고….

  아침이다. 아내가 새로 지은 밥상을 차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에다 따끈한 국, 김치와 생선구이와 찬 몇 가지, 그리고 방금 갈아낸 과일즙 한잔이 놓여있다. 가만히 쳐다본다. 모두가 생명체였다. ‘저들은 나를 위해 한생을 살아, 고통스런 최후를 치르고 밥으로, 반찬으로, 즙으로 변신되어 마지막 희생 제사상에 오른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거룩한 제사가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나눔이 있을까.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 나는 저들을 먹고 오늘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가 어찌 귀하고, 소중하고, 거룩하지 않을까. 만일, 내가 하루를 허투루 산다면, 저들의 희생이 헛되고 만다. 때문에 세상은, 밥을 먹은 자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것이리라.

  성호를 긋고, 고마운 마음으로 수저를 들었다.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모든 밥은, 성체성사다!

 

 

 

 

  * 성체성사 – 가톨릭의 7성사 중의 하나. 예수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밀떡과 포도주를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祝聖하여 신자공동체가 나누어 먹는 신앙 행위

 

       - 2016. 12. 09. <보리수필 11집> 발표 -




'아름답기 > 수필 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귀나무  (0) 2018.06.08
오월의 길목  (0) 2017.06.27
군불  (0) 2016.12.09
새봄, 오솔길에서  (0) 2016.04.03
박새의 응답  (0) 2016.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