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박새의 응답

보니별 2016. 1. 25. 23:43






                                          박새의 응답

                                                  

                                                                                 강길수

                                             

  가빠무덤 앞을 서성인다. 돌아오는 길엔 주인공을 만날까. 주인공이 와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텔레파시메시지를 온 숲으로 내보낸다. 기다림이 벌써 여덟 달을 넘어선다. 그러나 번번이 만나지 못했다. 비록 한 주간에 한 두 번씩 오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마실 물을 나누어주며 새로운 만남을 바랐다. 겨울엔 나누어준 물이 돌처럼 꽁꽁 언적도 여러 번이다. 인연의 공덕이 아직 모자란단 말인가.

  마른장마가 끝나고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이 내습하여, 연일 최고기온을 경신한다. 온통 찜통이다. 지금 이곳 기온은 섭씨 37도란다. 사람 체온보다 높다. 산길에서 피부로 느끼는 더위는 사우나를 방불케 한다. 언론이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변한다고 보도한지도 제법 오래 되었다. 그러니 생태계가 변하는 것은 당연할 테지만, 아무래도 무엇에 홀린 것만 같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등산객도 뜸하다. 세 번째 봉우리의 돌탑을 지나 서쪽 능선으로 스무 걸음 남짓 가면, 갈 때마다 마실 물을 나누어 붓는 가빠옹당이가 있다.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한 이래, 두 번째 가빠옹당이다. 가빠무덤 위의 가빠가 울면서 생겼다. 조롱박보다 작았던 처음 가빠옹당이보다 얕지만, 면적은 더 넓다. 차는 물의 양도 전에 비해 두 배 정도 더 많다. 작년 가을, 처음 주인공을 만났던 가빠무덤 귀퉁이의 옹당이는 세월의 발톱에 바닥이 긁혀 흠이 났던지 물이 샜다. 그 바람에 올 초여름 이곳으로 옮겼다. 생각해 보니 지난가을 첫 만남 이후, 올봄까지 주인공을 만나지 못했던 이유도 언젠가부터 물이 새는 데 있었지 싶다. 물만 나누어주면 일 다 했다고 치부했던 내 잘못이 컸다. 물을 나누어부은 후 옹당이 안에 물이 계속 있는지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가빠무덤은 재선충材線蟲에 감염되어 죽은 소나무를, 산 소나무로부터 격리시킨 무더기다. 죽은 소나무의 밑동과 줄기와 가지를 잘라 쌓아, 살충제를 뿌리고 두꺼운 가빠로 위를 덮고 옆을 감싸 밀봉한 소나무의 무덤이자, 재선충의 고려장이기도 하다. 산 사람이 살기 위해,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무덤과 별반 다를 데가 없다싶다. 사람은 죽어도 병원균은 살아서 함께 묻힐 테니 말이다. 재선충 병은 예외 없이 소나무의 목숨을 빼앗는 병이어서, ‘소나무 에이즈’라 불린다. 재선충이 기생한 소나무는 수개월 내에 모두 다 말라 죽고 만다고 한다. 치사율이 100퍼센트란다.

  갈증이 났다.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냈다. 웬일인지 오늘은, 나보다 먼저 주인공에게 물을 주고 싶었다. ‘미물에게 어찌 사람보다 먼저 물을 주려하느냐’ 하는 볼멘소리가 가슴 한쪽에서 났다. 다른 한쪽에선 ‘삼라만상이 다 한 동기 같다고 느끼던 마음은 어디다 묻어두고, 지금 무슨 허튼 소리를 하는 게냐’ 고 나무람 소리도 들렸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란 생각이 마음스크린에 비추어졌다.

  물을 가빠옹당이에 가득 부었다. 백 밀리리터 정도 될 양이다. 그래도 주인공에겐 흡족하리라. 텔레파시 메시지를 또 띄운다. ‘이 습하고 더운 날, 내 주인공 박새야! 부디 친구들과 이 옹당이에서 목을 축이렴. 내가 나누어준 물을 너희들이 마시는 모습을 이곳에서도 보고 싶구나.’ 나도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주위를 둘러보고 하늘을 쳐다봐도, 울창한 나무들에서 새들의 기척은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다. 이 산에 처음 올 때만 해도, 걷는 동안 새들의 맑은 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는데 섭섭하다. 저 아래 초입 골짜기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자 이 일대의 자연은 속절없이 변했다. 아직 두 해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많은 생명들이 사람에 의해 사라지는 모습이 가슴에 아리게 새겨지는 시간이었다.

  이른 봄, 유달리 붉은 복사꽃을 피워 불같은 정열을 뿜어내던 젊은 복숭아나무와, 연이어 찬란한 꽃으로 세상을 밝히던 커다란 벚나무와, 초여름 따가운 햇볕을 친구삼아 고가도로 밑을 연보라 보드라운 꽃으로 부부사랑을 수놓던 자귀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자귀나무아래 수로 벽 위에 초가을부터 무서리 내릴 때 까지 청초한 소녀로 피어나 젊은 날을 선물해주던 꽃, 내가 좋아하는 구절초도 어디론가 떠났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아파트 공사판 뒤로 길게 어우러져 있던 무성한 덤불이 베어져 버린 일이다. 덤불에 작은 새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르르 많이 깃들어 살았는데,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늘 가던 코스를 따라 걸었다. 등산로 옆에 사는 작은 산뽕나무 한 그루. 지난 봄, 엄지손가락 굵기의 두 줄기에 붙은 가지들에 제법 달린 팥알크기만한 작은 푸른 오디들에게 올 때마다 인사를 했었다. ‘너희들도 머지않아 까맣게 익을 테지. 그땐, 미안하고 고맙게 한두 개만 맛볼게.’ 라고. 오디가 익자 욕심이 생겨, 까치밥만 남기고 다 따먹었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너도 별 볼일 없는 존재잖아.’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큰 소나무 아래 살기에 해마다 송화 피는 계절이면, 유독 노란 송홧가루 세례를 무던히 받아내던 생강나무 잎도 만져본다. 지금은 세월의 흔적이 그 여리던 잎에도 그려져 있다. 송화도, 아기손등처럼 보드라운 잎의 촉감도 그 새 옛이야기다. 사람으로 치면 중장년 기를 살 텐데, 귀퉁이가 마른 것도 있고, 못된 사람에게 찢어진 것도 있으며, 송두리째 훑어져 나간 것도 있다.  미안한 마음으로 잎 하나를 만져준다. 손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촉감이 그래도 보드랍다. 생강나무는 욕심이 없어 큰 나무들 아래서 사는가 보다. 큰 나무 밑이니 햇볕이 부족할 텐데도 불평 않고 잘도 산다.

  돌탑이 있는 봉우리를 끼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한사람 가기에 알맞은 비탈오솔길이 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마치 고향의 진박골 할아버지산소에 가던 길과 흡사하다. 유년시절, 꽁꽁 언 진박골 개울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질주하던 스릴과, 산 자드락의 많은 무덤 주위로 펼쳐진 풀밭에다 소를 먹이던 낭만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중고등 방학 때는, 쇠죽을 끓이거나 군불 때는데 쓸 나무하러 다닌 길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오솔길을 걸을 때마다, 그리운 어린 시절로 마음은 내닫곤 한다.

  올 때마다 보살피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돌탑도 잘 있는지 살핀다. 돌아오는 길 약 반시간 후, 다시 옹당이 곁을 지날 때였다. 박새 한마리가 나누어 준 물에 목욕을 하다가, 내 발자국소리를 듣고 포르르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드디어 박새가 내 텔레파시메시지를 받고 응답했구나!’하고 속으로 외쳤다. 발걸음을 멈추고, 작은 졸참나무 뒤에 숨죽이며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로 했다. 스마트 폰도 꺼내 들었다. 잠시 후, 이번에는 두 마리의 박새가 날아왔다. 한 마리는 옹당이 위의 작은 가지에 앉았다. 목욕 순서를 기다리며 망을 보는 것 같다. 다른 한 마리는 가빠옹당이에서 목욕을 하였다.

  새가 목욕하는 장면은 어린 시절 먼발치로 본 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더구나 졸참나무 잎 사이로 사진까지 찍으면서. 먼저 옹당이 물에 몸을 퐁당 담그더니, 날개를 쫙 폈다 오므렸다하며 잽싼 날개 짓으로 물방울을 튀겨 온 몸에 분산되도록 하는 게 아닌가. 멋진 목욕부채춤이다. 귀엽다. 앙증스럽다. 목욕부채춤이, 보는 이도 목욕하듯 시원하게 한다. 아이들 어릴 때 비온 뒤, 빗물고인 공터 웅덩이에서 두 네살 박이 형제가 맨몸으로 신나게 물장난 치며 튀기던 물방울을 떠오르게 했다. 두세 번 목욕부채춤을 추더니 한 마리는 마치고, 다른 한 마리가 또 춤추었다. 그 사이 새끼 같아 보이는 더 작은 박새도 합류하였다. 이번에는 어미 새와 새끼 새가 함께 목욕부채춤을 추었다. ‘세 마리의 박새가 추는 목욕부채춤을 감상할 수 있다니, 굉장한 행운이야!’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으나 이내, ‘아니야, 박새의 응답이지!’하는 마음 소리가 울려 나왔다.

 



  지난 가을 인연을 맺어 겨울, 올 봄을 거쳐 여름까지 기다리며 섭섭했던 마음을, 되레 기쁨으로 바꿔 가득 채우고도 남는 박새의 응답이었다.  ‘콩 한쪽도 나눠먹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한줌밖에 안 되는 옹당이 물을 박새가 먹기도 하고, 목욕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연은 늘 놀라운 방법으로 사람을 감동케 한다. 보고 느낄 줄 아는 이에게 안식과, 위로와, 희망을 선물하는 존재, 자연. 마지막으로 모든 삶이 꼭 돌아가 쉬어야 할 둥지, 자연. 없는 듯 있고, 약한 듯 강하며, 시리 듯 따뜻한 존재, 자연.

  자연을 외면하고 살아온 세월이 오늘따라 더 아깝다. 자연 품에만 가면, 언제나 편안해졌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봉답奉畓 부치는 산골에서 자라나며, 내 고향은 척박한 환경이란 생각도 했던 지난날이 오히려 행복한 날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산골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연과의 소통 속에 있었으니 말이다. 모든 생명은 태생적으로 자연과 소통하며 살아야 할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지난 날, 인간은 자연과 소통하지 않고 지배만 하려 들었지 않은가.

  소통의 진한 기쁨이 가슴깊이 스며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박새처럼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작은 관심에서 출발한 박새와의 인연, 응답과 소통, 그리고 소통에서 오는 큰 기쁨…….

  무더운 날이었지만, 박새의 목욕부채춤 공연에 행복하였다.



                                                              (2015. 12. <보리수필> 10집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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