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派遣
강길수┃姜吉壽
땅거미가 붉은 서녘 햇빛을 블랙홀인 양 빨아들였다. 어둡다. 세상은 희미한 윤곽만 드러낸다. 아내를 차 안에 두고 혼자 올라가기 시작했다. 절반쯤 갔을까. 갑자기 웬 비명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깜짝 놀랐다. 아주 가까운 곳이다. 가슴이 쿵덕댄다. 다음 순간, 소리의 주인공이 저만치 달아나며 불평을 토해냈다. 바로 고라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고라니도 나만큼이나 놀랐을까.
암각화는 어둠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자기를 들어내기 싫은가보다. 암각화 바위와 왼쪽 소나무만 아슴푸레하다. 바위 뒤로 곤륜산 서북쪽 등성이가 나무들을 기둥삼아 저녁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낮에 많이 와 보았다. 혼자서 자주 왔고, 아는 사람과도 여러 번 왔다. 오전, 오후, 흐린 날, 비 오는 날 등 서로 다른 조건에서도 관찰했다. 홀로 상상해 보고, 함께 온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다. 색다른 생각이나 느낌은 매번 찾지 못했다. 하지만 암각화의 그 무엇이, 두고 온 고향처럼 자꾸 나를 끌어당겨 결국 이 저녁에 또 찾아오게 만들었다. 정말, 옛 주술사들의 술법이라도 걸려있는 건가.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 새벽이다. 성당 앞쪽에 그 여고생이 꿇어 앉아 있다. 세일러 교복 차림에 혼자만 까만 미사포를 썼다. 나도 그녀가 잘 보이는 곳에 무릎 꿇고 앉았다. 평일 새벽 미사인지라 사람이 적다. 학생은 우리 둘뿐이다. 제단을 향해 미사성제聖祭가 시작되었다. 사제와 함께 신자들은 열심히 미사를 드린다. 사제가 라틴말로 계啓를 하면, 신자들이 응應을 하는 부분도 있다. 뜻을 잘 모르는 라틴말을 섞어 드리지만, 미사는 늘 나를 감동시켰다.
암각화는 잘 보이는 것과 풍화되어 숨은 것도 있다. 나는 일곱 점 가량 찾았을 뿐이다. 처음 보았을 때는 방패연이 떠올랐었다. 보는 데 따라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 같은가 하면, 갑옷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람 얼굴이나 여성의 허리처럼 다가오기도 했었다. 피카소의 그림도 아닌데, 도무지 무엇을 새겼는지 모르겠다. 오늘 저녁엔 무슨 귀한 선물을 주려고 자신을 숨겨, 그 앞을 또 서성이게 만드는가. 만일, 저 암각화가 반구대암각화처럼 실물같이 새겼더라면, 이렇게 많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민다. 사방을 보며 선사시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암각화를 새기던 상황을 느껴보려고 다시 애쓴다. 돌칼, 청동칼과 도구들, 방패나 갑옷,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려 본다. 돌 제단과 제물도 생각해본다. 전에 배웠던 초감각적 지각의 방법까지 써보아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 감각안테나가 많이 녹슨 모양이다. 암각화는 저 앞에서 팬터마임을 하고 있는데,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이떼 미사 에스트 Ite missa est.” 하는 사제의 말에,
“데오 그라시아스 Deo gratias.”라고 신자들이 응답하였다. ‘미사가 끝났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지막 인사말 나누기다. 마음이 설렌다. 여학생을 만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생긋 웃으며 내 인사를 기쁘게 받아주는 예쁜 모습도 마주할 수 있다. 또 무엇보다, 새벽미사를 드리고 새 하루를 시작하는 나날이 힘나고 마냥 즐거웠다. 신자들은 성당 마당에서 사제의 미소어린 전송 속에, 미사에서 받은 새 힘을 마음에 간직하고 삶터로 나아간다. 나는 여학생의 인사선물을 덤으로 받아 더 기쁘게 성당 문을 나선다.
컴컴한 도랑 건너편의 암각화를 마주하고 섰다. 안 보여도 웬일인지 살아있는 존재 같다. 별들이 듬성듬성 반짝이기 시작한다. 내가 듣고픈, 그 옛날 암각화 새기던 얘기라도 서로 나누는 걸까. 별빛에 상상의 나래를 실어 마음껏 날아본다.
이곳 시사市史에는 저 암각화가 ‘검파형劍把形 암각화’ 즉, 칼자루그림이라고 씌어있다. 그러면, 왜 선인先人들은 바위 벽에 칼날은 생략하고 자루만 새겼을까. 시사는 이어 말한다. 선각線刻이 굵어 오래 새겼을 것이다. 갈고 문지르는 선각 새기기 동작은 인간의 성행위와 유사한 것이다. 그 행위는 ‘모방주술의례模倣呪術儀禮’와 ‘접촉을 통한 감염주술感染呪術’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신상을 ‘갈고 문지르는 행위에서 주술적 효과를 기대하는 농경신 신앙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9호 포항칠포곤륜산암각화’라는 결론이다. 하지만, 나에겐 시사의 내용이 실감나지 않는다.
감각적 느낌의 희망을 접어두고, 논리적 추론을 해보기로 하였다. 무엇을 새겼느냐보다, 새긴 목적이 더 본질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암각화는 바위에서 행해졌던 ‘의례’와 연관 있는 게 아닐까. 있다면 선인들은 바위를 의식의 단壇으로 삼아 모였을 거다. 지역공동체의 간절한 바람을 담아, 바위에 새긴 것과 같은 신성한 칼로 정성스레 마련했을 봉헌물. 봉헌물을 차려 예관禮官이 의례를 올렸을 것이다. 어떤 때는 봉헌물이 이 근처에서 잡은 고라니였을지 모르지. 아까 놀라 달아난 고라니는 그 옛날 하늘에 바쳐진 고라니의 후손일 수도 있을 테고.
의례 참여자들은 가족, 친지, 부족의 복을 빌었을 거야. 또,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임을 다짐했을 터. 어떤 총각은 내가 성당에서 여학생을 보며 미사를 드렸듯이, 아가씨를 몰래 보며 예를 올렸을지도 몰라. 의례가 끝나면 봉헌물과 곁들여 장만한 음식물을 나누어 먹고, 마시며 축제가 벌어졌을 테고. 젊은이들은 축제 때 그리운 이를 만나기도 하고 때론, 은밀한 사랑을 나누기도 했겠지. 지배층은 축제에 한 턱씩 내어 공동체 지배권을 과시, 강화하는 기회로도 삼았을 터.
더 생각해본다. ‘암각화를 의례의 상징 그림으로 새겼든 다른 목적으로 새겼든 간에, 선인들은 그림에서 위안을 얻고 치유를 받아, 공동체 일원의 정체성을 다짐했을 거다. 사람은 공동체로 사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사람의 공동체 참여는 자체에 목적이 있기보다, 그 안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어 세상에 나아가는 데 있다. 신자들이 미사에서 그러듯이…….’
추론이 여기까지 다다라 결론을 내리려할 때, 하늘 한가운데에서 별이라도 떨어지듯 밝은 별똥별이 동쪽으로 나는 장면이 확 떠올랐다. 유성은 머리위에 내려앉으려는 듯하더니, 곧장 곤륜산을 휙 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빛이 뇌세포를 투과라도 하는지 온몸이 짜릿해 왔다.
“그래. 그랬을 거야!”하고 혼잣말로 외쳤다. ‘옛날 이곳 선인들은 저 암각화 단 앞에 모여 의례나 행사로 공동체의 위안과 치유를 받고, 새 희망을 얻어 세상으로 ‘파견’된 것이로구나!’하는 깨달음의 추임새였다. 짜릿함이 상서로운 기운으로 변해 온몸을 충전하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파견’은 곤륜산 암각화를 새긴 목적에 대한 내 추론의 결론이기도 했다.
저 아래 차 안에서 아내가 텔레파시로 자꾸 내려오라고 재촉하는가보다. 그만 내려가야겠다. 뿌듯한 마음으로 암각화를 떠난다. 새긴 지 삼천 년도 더 되었을 곤륜산 암각화가 마음에 되살아나, 지금 나를 세상으로 파견하고 있다.
- <수필미학> 2015. 겨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