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똬리

보니별 2015. 7. 17. 11:29

 

 

[추억속으로] 똬리

                            

 

 

 

 

                                        똬리

                                                                               강길수 |姜吉壽

 

  작은 물방울이 포르르 날린다. 어머님 제삿날, 고향집 주방 앞 수도꼭지다. 물방울 앞으로 그 옛날, 물자배기를 인 젊은 어머니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난다. 어머니 얼굴 앞에 자배기의 물이 조르르 넘쳐 흘러내리며 물방울 되어 흩날린다. 어머니는 자배기 밑동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한손으로 훑어내고, 물자배기를 부뚜막에 내려놓으신다. 이어, 손때 묻은 똬리를 머리에서 집어 문설주에 거신다.

  지금은 주방으로 변한 부엌, 그때 우리는 정지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지다. 성긴 판자 두세 쪽으로 만든 커다란 양쪽 여닫이 정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받침돌을 밟는다. 우리 집 여인들이 대대로 이어오며 밟고 살아온 받침돌. 그 돌을 밟고 한 켜를 더 내려서야 바닥이다. 바닥 왼쪽에 땔나무가 있고, 북쪽 구석에는 커다란 물 항아리가 자리한다. 맞은편 낮은 단 위에는 새로 장만한 산뜻한 찬장이 올라있다. 오른쪽 부뚜막 가운데에 까맣게 윤나는 무쇠 솥 두 개가 오누이처럼 정답다. 큰 것은 밥솥, 조금 작은 것은 국솥이다. 솥 양옆 부뚜막에는 쌀 함지박이나 찬거리, 물자배기, 도마, 그릇 같은 것들이 필요에 따라 사이좋은 동기들처럼 놓여졌다.

  오른쪽 문설주에 큰 못 한 개가 박혀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못도 까맣게 그을려 있다. 못엔 늘 똬리가 집지킴이인 양 걸린다. 어린 나는 똬리가 있으면 그냥 좋았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똬리가 없으면 어머니가 물 길으러 혹은, 다른 일을 하러 가시어 안 계심을 금방 알아채고 시무룩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가시고 정지도, 성긴 판자 정지문도, 똬리도 다 스러지고 없다. 그나마 집이라도 남아 있으니 참 다행이다.

  봄 버드나무 그늘에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막걸리를 한 사발씩 들이 킨 사내일꾼들과 아낙모내기꾼들이 주고받는 농담들 때문이다. 어머니가 집에서 똬리위에 이고 오신 커다란 점심함지의 보자기가 걷힌다. 반찬들이 고루 놓아지고, 검은콩 섞인 고슬고슬한 고봉밥과 구수한 국 한 그릇씩이 나누어진다. 먹는 즐거움의 시간이다. 웃음소리대신 밥 먹는 소리에 곁들여 이웃 정담들이 오간다. 밥이 참말로 맛있다든가, 더 먹으라든가, 누군 장가들고, 누구는 시집간다든가, 뉘 집 아이는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는 등 동네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집 모내기하는 날, 논 가 냇둑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이다. 후딱 점심 그릇을 다 비우고 잠시 쉬고 나면, 누군가 멋진 노래 한곡을 뽑아낸다.

  “!”, “자아!” 하고 다시 못줄을 대는 구성진 소리에 맞춰 오후모내기가 시작된다. 그때, 어머니는 빈 그릇들을 담은 함지를 똬리위에 얹어 이고 집으로 가신다. 나는 막걸리를 담았던 커다란 양은 주전자를 손에 들고, 졸랑졸랑 어머니를 따라 나선다. 논둑길을 벗어나 냇바닥을 지나고, 큰길에 접어든다. 얼른 어머니 옆에 서면, 무명적삼을 입고 흰 수건을 쓴 어머니의 옆얼굴이 보인다. 땀방울 송송 맺힌 얼굴 위로 똬리의 한 쪽이 초승달처럼 숨은 듯 드러나 보인다. 어머니와 나란히,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무얼 사달라고 칭얼대기도 하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며, 노래도 부른다.

 

 

  어머니는 똬리를 주로 샘에 가실 때 썼다. 가끔 농사철에 새참이나 점심을 가져갈 때나, 밭에서 푸성귀를 가져올 때 쓰기도 하셨지만, 대부분 물을 길을 때 쓰셨다. 그 물로 밥 짓고, 설거지하고, 온 가족이 세수하였다. 또 정지에서 나오는 쌀뜨물과 개숫물을 모아 쇠죽을 끓이고, 때론 개죽도 쑤었다. 모름지기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똬리 위 물자배기에 어머니가 이고 오신 물로 사람도, 짐승도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똬리는 우리 집의 숨은 생명줄이었다.

  똬리는 여자들이 짐을 이고 나를 때, 머리위에 얹어 쓰도록 만든 고리모양의 머리 보호구다. 짚과 왕골 잎, 헝겊 같은 재료로 만든다. 짚을 도넛모양으로 감은 다음, 그 위에 왕골 잎을 엮어 외피를 입히면 된다. 똬리의 아랫부분은 얹는 사람의 머리에 맞게 오목하고, 윗부분은 평평하다. 똬리는 겉보기에는 가볍고 연약해도 짐과 머리사이에 자리하여, 제 몸에 내려누르는 짐의 무게를 푹신한 온몸으로 나누어 감당한다. 짐의 무게를 사람의 머리위에 넓게 분산시켜 정수리만 내려 누르는 위험을 없애고, 고통을 줄이며, 짐 흘러내림도 막는다. 똬리는 어릴 때의 농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하중荷重완충기였다.

  일제 강점기 보릿고개가 극심하던 시절, 우리 집은 산골에서 변변한 땅뙈기도 없이 사래논밭 얼마로 살림을 꾸리는 형편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돈 벌어 살림 펴보겠다고 징용으로 일본에 갔다. 스무 살 새댁은 홀로 엄한 시부모 모시고, 세 시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다. 가끔 학교에 다니는 시동생이 콩밥도시락에 삐쳐 안가지고 가면, 이십 리 길을 부리나케 걸어서 가져다주곤 했단다. 어린 시동생의 밥투정이 젊은 형수에겐 무척이나 안쓰러운 일이면서도 한편, 외롭고 고된 시집살이새댁이 오랜만에 똬리와 함께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을 터이다.

  위에 얹힌 짐과 짐을 인 사람의 머리 사이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똬리다. 짐을 이고 나를 때 똬리를 보기위해서는, 위치를 잘 골라 쳐다보아야 한다. 꼴이라든가 남새묶음, 소나무갈비포대, 잔가지삭정이 같은 푸석한 것을 이고 나를 경우, 똬리는 짐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많다. 똬리도 그렇다. 잘 보이지 않아도, 머리에 짐을 이고 나르는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니까.

  어머니는 첫아들은 낳아 한 달 만에 실패하였다. 그 와중에 남편은 돈 벌러 바다건너로 떠났으니, 장부丈夫 같았다는 시어머니의 등살이 어떠했을까. 남편이 옆에 없는 터에 누가 위로가 되었으랴. 아버지는 오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오셨다. 그 후 삼년이 다되어서야 어머니는 나를 낳으셨다. 그 오랜 시간, 시부모님의 손자타령은 또 오죽했을까. 자식 없이 석삼년 넘게 매운 시집살이 동안, 어머니의 똬리도 문설주에서 제대로 쉴 날이 없었으리라.

  그뿐 아니다.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은 유아 때 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어머니 가슴에 더 피멍이 들게 한 사건은, 집안의 웃음이던 똘똘한 세 살배기 막내가, 졸지에 끔찍한 변을 당하고 만 사건이었다. 모내기 하던 날, 동네 아이들과 냇가에 놀러 갔다가 불어난 냇물에 그만 떠내려가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만 것이다. 낳은 자식들 일곱 남매 중에 셋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낸 어머니시니, 그 가슴은 다 타버려 새까맣게 재만 남은 똬리 같았으리라.

  낡아 못쓰게 된 똬리는 아궁이에서 마지막으로 제 몸을 태워 밥을 짓거나, 쇠죽을 끊이거나, 아랫목을 덥힌다. 타고 남은 재는 논밭에 뿌려져 작물의 자양분이 되고, 아궁이에 못간 헌 똬리는 두엄자리에 가 썩어 논밭의 거름이 된다. 이렇게 마지막 한 가닥까지 다 타거나 썩어,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주는 것이 똬리다. 자기희생의 표본이다.

  어머니도 중년이 되었다. 가끔 아버지가 늦어지시는 날, 어머니는 아이들 잠든 밤 머리맡 등잔 앞에 혼자 앉아, 몰래 꽁초 몇 모금씩을 피우셨다. 어쩌다가 내가 잠들지 않아 기척을 하면, 죄지은 사람처럼 얼른 꽁초 불을 끄셨다. 담배 몇 모금만으로는 마음 다스리기가 부족했던지, 어머니는 급기야 속병을 얻으시고 말았다. 건넌방 군불솥에 초피나무가 그득 삶아지는 날은, 어머니가 속이 아프신 날이라는 신호였다. 초피나무 삶은 까만 물은 어머니가 스스로 체득하여 진단하고, 처방하신 속 다스리는 평생 탕약이었다. 탕약 드시는 날도, 우리 집 똬리는 여전히 쉬지 않았다.

  한 봄날, 고향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이다. 사과나무의 적과摘果를 하시다가 떨어져 다쳤단다. 심각한 것은 아니라 하여, 사흘 후 토요일 날 부랴부랴 달려간 병원. 어머니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말도 못했다. 어머니의 아랫배 부분이 홑이불 속에 똬리를 넣은 듯, 봉곳이 솟아올라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순간, 어머니의 고통이 바로 내 심장에 와 꽂히는 듯 했다. 소변을 못 보아서 그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늘게 끄덕였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병원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를 질렀다. ‘환자가 이지경인데, 뭐하는 게 병원이냐!’. 평소 큰소리 잘 지를 줄 모르던 내가 어찌 그랬는지 의아하다. 의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가는 고무호스를 가져와 어머니가 소변을 보실 수 있게 하였다.

  참을성 하나로 생을 버텨 오신 어머니가, 병원 침상에서 마저 억지로 고통을 참아내기만 한 것이 한 눈에 드러나 너무 아팠다. 무거움이 온 몸을 조여와 터질 듯해도 용케 짐의 무게를 감당해내는 똬리처럼, 까무러칠 고통을 사흘간이나 온 몸으로 감내하신 어머니. 고난의 한평생에 스스로 고통완충기가 되어버린 어머니. 소변을 다 보시자 구름 걷힌 하늘처럼 얼굴이 해맑아지는 바보 어머니. 꼭 당신이 쓰던 똬리 같이 미련스레 무던하신 어머니…….

  가족들과 의논하여 어머니를 동생 가게에서 가까운 큰 병원으로 옮겼다. 한 달가량 입원 후, 어머니는 퇴원하셨다. 그때 회갑을 갓 넘긴 어머니는, 이 일로 방광 쪽이 좋지 않게 되어 남모르는 고통을 하나 더 감내해야 했다. 소변을 보실 때마다,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자식들은 아무도 모른다.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어서다. 어머니는 그 고통을 참아 받으며,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을 더 사셨다. 훗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는 원인도, 노환에 겹친 방광의 악화였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똬리를 쓰지 못하게 되셨다. 똬리를 두고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어머니는 똬리처럼 사셨다. 아니, ‘우리 집의 똬리로 사셨다. 고된 집안일은 물론, 집안의 크고 작은 바람을 다 받아들여 참아내고, 이겨냈으니 말이다. 오랜 매운 시집살이에다, 세 시동생을 돌아가신 시어머니대신 출가시키고 살림 내보냈다. 먼 저 간 자식 셋을 가슴에 묻은 채, 속병을 홀로 초피나무 삶은 물로 다스리며 평생 사신 어머니. 똬리같이 가족과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에 눌리고 묻혀,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신 어머니.

  어머니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자식들과 집안을 위해서만 자신을 쓰셨다. 세상 떠나시면서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손자에게 건네준 현금 만 천원이 전부였다. 쓰는 사람 위해 모든 걸 바치는 똬리처럼,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모두 바쳤다.

  생각해보면, 삼대가 함께 사는 가족에다 먼저 간 가슴에 묻은 자식들, 그리고 친척 모두가 어머니란 똬리위에 올리어진 물자배기 같은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대가족 살림살이는 어머니란 똬리위에 얹혀 있었기에, 일제강점기로부터 육이오동란을 거쳐 오는 민족수난의 험난한 보릿고개 길을, 용케도 잘 버텨 온 게 틀림없다. 때문에, 우리 동기들에게 어머니는 우리 집 똬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어머니 가신지 벌써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주위에서나 고향에서도 똬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식들의 마음에 새겨주신 보이지 않는 똬리는 생생히 살아있다. 그 힘으로, 남은 우리 동기 네 남매는 다툼 없이 이제껏 잘 살고 있다. 아마 우리도 어머니처럼, 서로에게 똬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세상도 기실, 서로 똬리가 되어주며 살아가도록 마련되어있다고 깨닫는다.

  똬리사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였다. 어머니가 그리워서다. 나온 몇 가지 사진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 옛날, 어머니가 이고 다니시던 것과 같다. 겉 왕골 잎은 색이 바랬다.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싶어졌지만 그럴 수 없다. 대신, 모니터에 비친 똬리에 손가락을 대어본다. 어디선가 짚과 왕골 냄새에, 땀내와 아주까리 머릿기름 냄새가 밴, 어머니의 똬리냄새가 짙게 퍼져오는 것만 같다. 마음속에서 젊은 어머니가 똬리월계관 쓰고 웃으신다.

  오는 휴일에는 민속박물관에 가봐야겠다. 똬리를 만나러…….

 

 

                 ** 2015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우수상 당선작 **

 

          ** 똬리사진 : 유성문 여행작가 님의 신문 기사에서 가져왔음을 밝히며 감사합니다. **

     

          ** 삽화 : 이영철 화가(2015.12.4자 매일신문 게제 '똬리'에서 가져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상식
 
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상식이 16일 대구 수성구 범어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수상자와 심사위원, 내빈들이 시상식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 시상식 사진 : 매일신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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