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어린 졸참나무 가지

보니별 2012. 8. 28. 21:41

 

 

 

 

 

                             어린 졸참나무가지

 

                                                                                 강길수│姜吉壽

 

  문득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어린 졸참나무가지 하나 때문이다. 등산로 고갯마루 부근 어느 묘역 곁이다. 십이월이 코앞인 추운 날씨에 연약한 나뭇잎 몇 개가 새 가지에 매달려, 마치 오월의 나뭇가지와도 같이 연녹색으로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으로 친다면 귀염둥이 세 살배기라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린왕자 일곱 살 초립둥이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놀라고 감탄할 겨를도 없이 마음이 억새풀에 베인 듯 아려왔다. ‘저 어린 것이 곧 맞닥뜨려야 할 칼바람의 고통을 어찌 이겨내려 하는가?’ 하는 생각이 함께 들어서다.

  오후에 갔던 등산로에서 일어난 일이다. 늦가을의 산은 나무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사람들과는 달리 가을걷이도, 땔감 저장도, 두꺼운 옷 준비도, 문풍지 붙이기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었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있었다. 앙상한 가지, 다 벗은 맨몸이 되면 나무들은 겨울맞이가 끝나는 셈이다. 사람들은 옷을 더 입는 계절인데, 나무들은 되레 옷을 벗어 버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다른 세계에라도 온 듯 낯설었다.

  한데, 어린 졸참나무가지는 너무나 달랐다. 봄날의 넘치는 생기를 아직도 뿜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비록 어린 몸이지만, 예쁜 연록 잎으로 치장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늦가을 하늬바람 소리를 춤 노래 삼아 덩실덩실 춤도 추었다. 노랫말이 내 귀엔 이렇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지난 추석 전 벌초 날 아닌 밤에 홍두께처럼 영문도 모른 채, 몸이 송두리째 잘려나가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졸참나무에게 들이닥쳤던 것이다. 하지만, 졸참나무는 주저앉지 않았다. 드러눕지도 않았다. 자기 몸을 베어낸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뿌리까지 캐냄을 당하지 않고 밑동이라도 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시 살겠노라고 아니, 기어코 부활하겠노라고 분연히 일어섰다. 남은 밑동에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싹틔우고야만 작은 눈 하나. 작은 눈은 가을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새싹으로 움터 기어이 어엿한 어린 가지로 자라나고야 말았다.

  어린 가지는 어찌하여 저리도 열심히 춤을 출까. 무에 그리 좋을까. 뭐가 그리도 기쁠까. 아니면 무엇이 그렇게 즐거울까. 하긴 이제 세 살배기 귀염둥이가 싸늘한 하늬바람의 뜻을 눈치 채려 하지 않을 터다. 어린왕자 일곱 살 초립둥이도 그런 것에 아랑곳 않을 터. 지금 부는 바람과 어우러져 춤추고 노래하며, 열심히 놀고 자라나면 그뿐인 게다.

  한참을 보고 있으려니, 처음 보았을 때의 ‘칼바람의 고통을 어찌 이겨내려 하는가?’ 했던 안쓰러운 마음은 어느 새 다 사라졌다. 연녹색 작은 가지가 오히려 재롱떠는 세 살배기같이 혹은, 건방부리는 일곱 살 초립둥이처럼 귀엽고 생기 넘쳤다.

바람이 자고 어린 가지의 춤도 멈추었다. 비로소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 다른 나무들과 대비하여 보였다. 저 여린 가지가 살을 에는 겨울 추위를 과연 이겨낼 수 있을지. 잎은 그대로 얼어붙을 터인데, 가지는 잎을 잃고 어찌 견딜 것인지. 겨울을 얼어 죽지 않고 용케 견뎌낸다 하더라도, 내년 추석벌초 때 또 잘려나갈 운명이 괴물처럼 버티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억새에 베인 마음이 더 아려왔다.

  다시 하늬바람이 더 세차게 불었다. 어린 가지는 보는 이의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더 흥겹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주 선 이의 마음에 이렇게 속삭였다.

 

 

 

  “오래 산다고 다 좋은 건가요?

  짧아도 열심히 살아내며,

  뭐든 기쁘게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난 늦가을이 참 좋아요.

  하늬바람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추면

  세상 모두가 한 몸이 되니까요.

  또, 이때는 춤춰도 안 덥잖아요.”

 

 

  순간, 어린가지가 거룩해 보였다. 숱한 가을을 살아온 나보다 저 어린 가지가 세상을 더 잘 살아낸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먼저 간 졸참나무는 짧은 한 생을 인간의 폭력으로 무참히 마감했다. 하지만, 남은 밑동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작은 눈 하나 움틔워 어엿한 어린가지로 자라나, 낙엽 져 을씨년스런 세상을 연록 생명의 등불로 밝히는 모습이 장하고 부러웠다.

  사람들은 어떡하든 오래 살려한다. 한데, 어린 졸참나무가지는 오래 살려하지 않는다. 칼바람 만나 잎이 단풍들지 못한 채 얼어서 말라 떨어진다 해도 어린 가지는 개의치 않을 게 분명하다. 하늬바람 싸늘한 늦가을 날을, 홀로 연녹색 봄날로 살아내며 제 몫을 다했으니까.

  무덤 너머로 어린 졸참나무가지가 또다시 춤춘다. 즐겁게.

 

 

 

 

                   ( <에세이21> 2012.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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