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개발실
강길수
천국이 따로 없다. 낮엔 종일 상상의 누리를 노닐고, 밤엔 일석점호도 취침점검도 없다. 게다가 야간 불침번도, 보초도, 위병조장(衛兵組長)도 안 선다. 그러니 여기가 바로 천국인 게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큰 타원형탁자가 가운데서 오는 이를 반긴다. 열람용이다. 주인을 기다리는 대여섯 개의 의자가 탁자 주위에 빙 둘러 있다. 탁자 뒤쪽중앙에는 전당포의 물품 교환 구 같은 반원모양 대출구가 문을 향해 배시시 웃고 있다. 책꽂이는 진열실 뒤쪽 벽면에 가지런히 서 있다. 책이 책꽂이를 거의 메웠다. 절반이상이 교범(敎範) 등 군사용 책이고, 일반 책은 대부분 교양서적이다.
‘전력개발실(戰力開發室)’. 책을 생각하다가 불쑥 떠오른 단어이다. 아마도 내 눈부셨던 젊은 날의 메모리칩에서, 생각이란 마우스로 클릭당해 뇌리란 모니터에 떠오른 단어일 게다. 잊고 살던 보물을 찾은 기분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돌아봐도, 약 일 년 정도 되었을 전력개발실 근무는 내겐 큰 행운이었다. 공부 등 목적에 쫓기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책을 만났기 때문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선물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군대 복무기간에…. 전력개발실은 우리 부대의 젊은 지휘관이 만든 부대 내 도서실이었다. 사회직제표현방식을 빌리자면, 나는 새로 생긴 부대 도서실의 실장 겸 직원인 셈이었다.
“부대장은 왜 도서실을 ‘전력개발실’이라 이름 지었을까? 전력은 교육훈련을 통해 개발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전력이 어찌하여 책을 통해 개발된다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군부대 전체가 전력개발실이 아닌가?” 등의 뻔한 의문을 처음 잠시 가지기도 했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들을 접었다. 책꽂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군사용 책들이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전력개발실’은 또 다른 의미로 나에게 다가온다.
‘전력(戰力)’의 사전적 뜻은 ‘전투나 경기 따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근무한 전력개발실은 군대에 있기에, 풀어 쓰면 ‘전투능력을 개발하는 방’이 된다. 전투는 전쟁 때 군인이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삶을 두루 살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전투는 싸움이아니던가. 인간은 유사 이래 질병, 범죄, 기아, 전쟁, 인권유린 등 자신의 여러 문제들과 싸워왔다. 또한, 가뭄과 장마, 홍수와 폭설, 혹한과 무더위, 태풍과 해일 등 자연재해와도 싸우며 살아왔다.
지구생태계를 보자. 생태계는 적자생존(適者生存) 즉, 환경에 적응하는 생명체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말이다. 생명체가 살기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이겨내며 끊임없이 먹이를 구하여 먹어야한다. 바꾸어 말하면, 생태계는 바로 생명체들이 먹이 싸움을 치러내는 곳이다. 미생물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이 싸움에서 예외가 없다. 싸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한다. 먹이싸움에서 이겨 먹을거리를 먹고 힘을 길러, 또 다른 먹이 싸움을 치르며 사는 존재…. 바로, 우리 푸른 지구별의 생명체가 살아내는 슬픈 방식이다.
인간사회는 어떤가? 유사 이래, 인간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생존경쟁체제’를 만들어 살고 있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력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 경쟁력은 곧, 실력이나 전력의 다른 말이 아니던가. 군인이나 선수를 두고 말하는 전력이 개인이나 사회, 국가의 차원으로 옮겨지면 실력이나 경쟁력으로 말만 바뀔 뿐, 그 본질은 같다. 끊임없이 경쟁력을 쌓으며 생존싸움을 치러내는 슬픈 틀…. 바로, 인간이 만든 사회다.
생태계나 인간사회 모두 결국 생존싸움터다. 생명체들은 생태계에서 먹이의 힘으로 싸울 힘을 길러 살고, 인간은 사회에서 교육훈련으로 경쟁력을 키워 살기 때문이다. 생태계도 인간사회도 결국 전력개발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여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체는 전력개발실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거기서 죽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랑한다. 인간은 지구의 유일한 ‘이성(理性)적 존재’요, ‘불멸의 영혼’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므로 그 ‘주인’이라고. 때문에 지구는 물론, 우주까지 인간이 마음대로 이용하고 다스려야한다고.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 자랑만 할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인간이 자기를 ‘지구의 유일한 이성적 존재라 자각’한다면, 내가 살기위해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하는 잔인한 자기생존양식(生存樣式)의 비극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다른 존재의 고통과 희생의 대가다. 인간은 여태 이 진실을 외면하고, 회피해온 것일까. 아니면, 아직 모르는 걸까. 그 것도 아니면, 알아도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온 걸까. 인간이 진정 만물의 영장이라면, 생존싸움에서 이긴 자만 살아남게 되는 생태계의 처절한 비극을 인간만이라도 극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마땅하다 싶다. 또한, 진정 인간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면, 생명을 먹어야 사는 먹이사슬의 질서를 뛰어넘는 존재로 진화해야 한다고도 하고 싶다.
‘구원’은, ‘깨달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이 끔찍한 자기생존의 근원적 비극을 외면한 구원과 깨달음이 있을 수 있을까. 있다면 그 것은 눈뜬장님 같거나, 자기최면에 홀린 것일 게다. 믿고, 기도하고, 염불만 하면 이 비극은 해결되는 걸까. 불행하게도 인류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지구촌에서 하루빨리 전쟁을 위한 ‘전력개발실’이 진화를 위한 ‘진화개발실’로 바꾸어지면 좋겠다. 그 길이 바로 인간이 제대로 진화하는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기울려, 세상을 ‘진화개발실’로 바꾸어 나아가는 길! 그 새로운 길을 걷는 지구촌을 빨리 만나고 싶다. 생태계와 사회의 근원적 비극을 함께 극복하는 새로운 지평, 자기완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새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저 드넓은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더 아름답다.
- <보리수필> 6집 - 2011. 11. 11.
'아름답기 > 수필 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 졸참나무 가지 (0) | 2012.08.28 |
---|---|
한 청개구리의 특별한 여행 (0) | 2012.07.04 |
수유리의 꿈 (0) | 2011.12.15 |
마지막 아침 (0) | 2011.01.28 |
들국화 (0) | 2010.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