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마지막 아침

보니별 2011. 1. 28. 11:58

 

 

 

 

 

                     마지막 아침

 

 

                                                                                 강길수 |姜吉壽

 

  만나자마자 남이는 자기 방으로 함께 가자고 하였다. 내가 밤 열차를 타고 왜 이곳까지 왔는지 모를 리 없는 그녀다. 그런데, 아침 이른 시각에 어찌하여 자기가 사는 방으로 가자고 하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아가씨가 자취하는 곳에는 처음 가보는 길이니 무엇에 홀린 것 같기도 하다.

  둘이서 한참을 걸어 도착한 남이의 자취집은,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였다. 방 한 칸에 연탄불 아궁이 하나 딸린 방이 그녀의 거처다. 남이가 방문을 열었다. 나는 그만 감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것은 내가 ‘최후의 조찬’이라고 이름 짓고, 평생토록 혼자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려했던 일이다. 깔끔한 방안에는 밥상 하나에 깨끗한 밥상보가 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밥상보를 걷었다. 밥상엔 새로 지은 밥 두 그릇과 새로 만든 카레 한 그릇, 그리고 김치 한 접시가 두 벌의 수저와 함께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남이는 새벽에 일어나 오로지 나를 위해 밥을 짓고, 카레를 만들었을 것이다. 잘 먹겠다고 말하고 나서, 난생 처음 그녀와 겸상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감동한 나는 밥을 먹는 동안, ‘결혼 생활이란 이런 거겠지!….’하는 마음이 문득 들었을 뿐,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맛있는 카레 밥을 후딱 다 먹었다.

  그날 아침밥은 사실, 남이와 내가 함께 먹은 처음이자 마지막 아침이었다. 그 전에 같이 아침 먹을 기회가 한 번 있었다. 하지만, 해변에서 밝게 떠오르는 해맞이를 함께 하고, 시가지까지 걸어오면서 얘기에 마음이 홀려 아침밥도 거르고 말았었다.

  우리는 그녀가 미리 생각해둔 그 도시 근교에 있는 어느 호젓한 관광농원에 갔다. 숲으로 이루어진 농원이다. 산책길엔 버드나무가 도열해 서 있고, 사람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다. 숲에도 가을이 왔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함께 걸었다. 한참을 걷자, 이슬 머금은 안개가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남이와 나는 안개 품에 안겨 삶과 공부, 일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흐르는 안개를 휘둘러 감은 채, 이슬 맺힌 머리카락을 한 그녀는 마치 길 찾는 요정 같다고나 할 모습이다.

  나는 속으로 망설였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봄 내가 선 본 이야기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이미 그녀가 눈치 채 고 있을 이야기, 내가 온 목적인 바로 그 말도 기어이 하고야 말았다. 그 말이란 다름 아닌, 바로 다음 주말 내가 지금의 아내와 약혼한다는 말이었다.

  남이는 내가 군에서 제대 후 고향에서 일시 보낼 때, 모 잡지 독자란에 실린 내 산문이 인연이 되어 알게 된 아가씨다. 우리는 펜팔오누이로 삼년을 함께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맑고 아름다운 사이의 오누이이다. 성류굴을 함께 구경하며 좁고 경사진 곳을 오를 때, 손 한번 잡아 당겨 올려준 것이 전부인 사이이니 말이다. 이 점은, 남이에게 있어서 나도 같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결혼을 앞두고 내가 직접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도리라는 마음이 들어 찾아 만난 것이다.

  남이는 다소곳이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자,

  “오라버니는 새언니와 잘 사실 거예요!” 하면서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옷이 안개비로 제법 촉촉해졌다. 그 때까지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작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남이도 나도 슬픈 마음을 말하거나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어떤 행동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 것은 아마, 우리를 감싸고 촉촉이 옷을 적셔오는 안개비의 신비한 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변하며 보이는 세계보다는, 변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을 세계를 서로 느끼고 있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것도 아니면, 텅 빈 그릇이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듯, 가을하늘처럼 비어 푸른 마음을 서로에게서 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차마 물어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이야기만 빼고, 생각나는 모든 이야기들을 다 남이와 주고받았다. 그날은 물론, 그간 그녀와 나눈 모든 이야기들은 훗날 밤하늘의 별이 되어 반짝반짝 내 삶을 비추어 주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그 별들의 비호(庇護)를 받아 꿈꾸고, 숨쉬며, 고이 살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해 섣달에 쓴 내 습작노트에는 그녀를 한포기 꽃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너는 억만 개의 방울처럼

  웃음으로 쏟아지는

  별들의 이야기 먹고사는

  커다란 눈망울의 한포기 꽃…….”

 

  차마 물어보지 못한 한 가지 이야기는, 그 후 내겐 걸어보지 못한 길처럼 풀어낼 수 없는 하나의 신비한 숙제가 되고 말았다. 숙제란 다름 아닌,

  ‘마지막 아침을 왜 남이는 나에게 차렸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그 의문을, 늘 푸르러 지지 않을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삼아, 혼자마음에 오래토록 간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란 강이 나를 가로질러 많이 흐르는 동안,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은 다른 이들에게 보여 지고 또, 열매도 맺는 것이 더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 궁리해보기도 하고, 알 만한 여성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숙제는 속 시원히 풀어지지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한 여행길에서 만난 약혼을 앞둔 어느 고운 아가씨에게서 들은 얘기가 지금도 내 귓전을 맴돈다.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밥상을 차리지는 않아요!”

 

 

      ** 2010. 12. <보리수필> 5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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