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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학동등산로[8](어느 성자)

보니별 2010. 4. 18. 15:32

 

 

 

 

                 양학동 등산로 [8] (어느 성자)

                                                          

                                                                           강길수

 

 

  그대….

  요즈음은 행복한 것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 게 무엇이냐’고요? 아마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그대는 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중요하고 절실한 일이라 여기기에 그대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오.

  무슨 얘기이기에 뜸 드리느냐고요? 미안합니다. 그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 조급증을 푸시구려. 또 사설이라고요. 아, 알았어요. 이젠 말할게요. 오늘 이야기는 ‘어떤 성자(聖者)’ 얘기랍니다. 양학동 등산로에서 내게 성자로 보인 사람 말입니다. 그러니 기대와 다르더라도 그대는 들어 주실 거라 믿고, 내 얘기 보따리를 풀겠어요.

  전에도 얘기 한 것 같지만, 내가 처음 양학산에 등산을 시작 했을 때는 두 시간을 가도 거의 사람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산등성이로 난 길도 좁은 오솔길이 하나 있을 뿐이었지요. 따라서 등산로에서 사람이 버린 쓰레기는 생각 할 수도, 찾아 볼 수도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순결하리만치 깨끗하고 푸른 산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사람이 늘어났지요. 우리나라 경제가 외환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아이엠에프 비상경제 관리체제가 된 무렵부터였다고 기억됩니다. 좁던 오솔길도 사람들의 발자국에 점점 넓어져 갔어요. 이 무렵 간혹, 등산 길 옆에 흰 휴지 등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보이는 쓰레기의 종류와 양도 늘어났지요.

  그대.

  깨끗한 산에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보일 때는 기분 나쁘고 짜증도 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때로 혼자말로 투덜거리며 그저 남의 일처럼 그냥 지나다녔지요. 어느 날, 숲이 더 우거지고 외딴 곳에 어느 고마운 분들이 만들어 놓은 서까래의자에 앉았습니다. 땀이 나, 조금 쉬어가기 위해서였지요.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누가 버린 흰 휴지들이 너덜너덜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버려진 과자껍데기, 귤껍질, 사과껍질, 빈 요구르트 병, 빈 우유팩도 보였습니다. 나는 혼잣말로 불평했습니다.

  “웬 못 된 아줌마들이 쉬를 하고나면 뒤처리를 깨끗이 해야지! 저게 뭐람? 고양이도 제 배설물을 묻을 줄 아는데.”

  “자기네 집에서는 분명 안 그렇지, 이중인격자들….”

  “기껏 몇 시간 등산 올 것을 못 참고, 그 많은 간식거리와 술은 뭣 하러 가져오고, 먹었으면 포장지와 용기는 되 가져 갈 것이지, 이 산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쓰레기로 버린담!” 등등의 속말을 늘어놓았지요. 화풀이 하듯 잠시 그러고 나자, 어디서 이런 내 속말이 들렸습니다. ‘삼십년 넘게 환경 분야에서 일 해온 네가 왜 이래? 불평만 하면 뭘 해, 세상이 달라지나? 작은 것부터 실천 해야지!’….

  옆의 마른 나뭇가지로 작은 막대를 만들었습니다. 휴지 등 빨리 썩는 것은 낙엽 깔린 땅 속에 밀어 넣어 묻고, 그렇지 않을 것은 주머니에 주워왔지요. 그날부터 그렇게 세월을 보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날은 예전처럼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속으론 불평을 여전히 하면서 말입니다. 내가 휴지를 묻는다거나 우유팩 등을 줍는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괜히 제자랑 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피하기도 했지요.

 

 

 

 

  그대.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나는 작은 나무 막대를 들고 걷고 있었는데, 길에서 상당히 떨어진 저 아래 쪽에 누가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자세히 보니, 그는 산비탈에 멀리 버려진 쓰레기를 줍고 있었습니다. 큰 포대를 등에 지고, 깡통, 소주병, 우유팩 등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말없이 혼자 줍고 있었지요. 마치 옛날 넝마주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등에 큰 대나무 망태기를 짊어지고 거리에서, 공터에서, 쓰레기장에서 일하던 그들과 닮았으니까요. 아마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습니다.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요.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저기 오늘날의 예수그리스도가, 석가모니부처가 계시구나!’ 하는 마음이 퍼뜩 전율처럼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하고 나는 큰 소리로 그에게 말했고, 그는

  “예.” 하고 짧은 대답을 하고는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 나아가 우리 지구의 생명을 구하는 현대의 성자로구나!…’ 그리고 나는 그 성자 앞에서 교만하고 모자란 자신의 모습이 확 나타나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맘 내키면 휴지 몇 장 묻고, 버려진 쓰레기 몇 개 주우면서 ‘못 된 아줌마’, ‘이중인격자’, ‘억하심정’과 같은 원색의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 말입니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티끌을 탓하는 자’가 바로 나 였던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은 슬펐지만, 다른 한 편으론 참으로 기뻤습니다. 모르던 제 모자람이 드러났으니, 고칠 길도 열릴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대.

  그 다음부터는 양학동 등산로에서 거의 불평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대는 이해해 주실는지요? 열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묵묵한 실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과 부처의 수행 길을 걷는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하나의 실천들이 모여 큰 흐름이 되고, 그 흐름이 사람과 사회를 바꾸어 환경을 살리는 방법임을 또 확인 하였지요. 더 나아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언제나 살아야할 푸른 별 지구를 살리는 길임도 깨달았고요. 그리고 또 하나, 사람이 성자가 되는 길은 쓰레기 줍는 길과 같은 가깝고도 먼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선지, 요즈음의 양학동 등산로는 예전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 시작할 무렵보다는 훨씬 더 깨끗해졌습니다. 이것이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해 주고 있으니, 내가 양학동 등산로를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는 것이지요.

  어떤 곳은 산등성이 전체가 사람 다니는 등산로로 되어버려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푸르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지구는 그 정도 고통은 자신의 분신인 우리 사람들을 품어내기 위해, 기꺼이 감내해 주리라고 나는 믿는답니다.

  그대….

  오늘도 나는 푸른 양학산에서, 그 묵묵한 성자를 다시 만날 행복이 기다려진다오.

 

 

               

 

 

 

 

                     ( 2010. 4.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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