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양학동 등산로[7](반갑습니다)

보니별 2007. 10. 31. 21:43
 

                              양학동 등산로[7](반갑습니다)

                                                        

                                                                          강 길 수


  “아저씨! 의원 출마하려 하세요?…”

  지나가는 이의 기분 좋은 농담 인사다. 십일월도 사흘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푸르러 높은 하늘이다. 사람들의 가을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마음은 저 맑은 하늘처럼 텅 비워졌을까. 나는 오늘도 양학동 등산로를 걷고 있다.

  오래 전, 어느 늦가을의 일이 생각난다. 우리부부가 속한 한 모임에서 친목과 건강을 위해 이 곳에 함께 정기적인 등산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며칠 뒤부터 등산을 시작하였다. 시가지와 이웃한 야산이지만,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자연을 그대로 만날 수 있어 참 행복했다. 다른 이들은 두세 번 등산 한 후에 대부분 그만 두었으나, 나는 이따금씩 다른 사정으로 못가는 경우를 빼고는 꾸준히 다녔다.

  아이엠에프경제관리체제가 우리사회를 온통 뒤 흔들게 되자, 등산객이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는 이들을 만난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모두가 무표정한 얼굴로, 혹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지나치고 있었다. 사회분위기 때문일까.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 등산을 계속하였다.

  숲은 사람들의 일에는 아랑곳 않고 늘 푸르기만 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 잠시 쉬어가는 작은 봉우리에 앉아 땀을 닦고 있었다. 푸른 소나무 가지에 작은 새 몇 마리가 날아들었다. 새들은 무척 반가운 듯 서로 몸짓을 하며 지저귀기 시작했다. 게다가 푸른 소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새들도 나뭇가지들도 그리운 친구들을 만난 듯이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것만 같았다. 문득, 예전에 받은 새마을교육 때의 한 재미있는 강의가 생각났다. 웃음이 얼굴에 배어나는 나이 드신 선생님의 '예절' 강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인사부터 해야 한다. 인사엔 순서나 나이가 없으며,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다. 인사야 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첫 번째 일이며, 돈 안들이고 성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며느리에게도 먼저 '반갑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인사한다. 그러면 밥반찬이 달라진다.” 라고 요약 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겠다며 살아온 내가, 이 등산로에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그 쉬운 인사 하나 못하지 않는가? 더구나, 봉사자로 남들 앞에서 일한다는 내가, 사람을 만났는데 그냥 지나치다니…. 위선이고 자기기만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흘렀다. ‘그래, 내가 먼저 인사하자’ 하고 마음먹었다.

  다음 순간부터, 마주 오는 남자들에게 나는 무조건 “반갑습니다!”하고 인사했다. 일부러 약간 목소리의 톤을 높인 음성이다. 아이들에겐 손을 흔들며 “안녕!” 하였다. 여자들을 만나면 쑥스럽기도 하고 또 상대방이 이상하게 여길까봐 인사하지 못했다. 한 달 가량 지난 어느 날, ‘남자만 사람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 여자들에게도 무조건 인사하기 시작했다.

  처음 얼마간은 인사를 해도 그저 무표정하게 지나치거나,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간혹 만났다. 그럴 땐 기분이 상했다. 아내와 같이 가는 날 그런 일을 당하면 그녀는, “무안당하며 뭐 하러 인사해요? 그만두세요!”하고 충고와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인사를 계속 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더러는 격려하는 농담도, 진정으로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는 분들도 만났다. 어느 날은 “산에 그렇게 다녀도 인사 받아보기는 처음입니다!”하며 기뻐하는 가족을 만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함께 걸으면서 자기 가정이나 신상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의견을 묻기도 했다. 가끔씩은 처음 만난 분과 도중에 있는 간이 찻집에서 차를 나누면서 사람 살아내는 얘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아는 사람도 몇 분 생겼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나는 내 내부에서부터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것은 그 단순한 인사가 내겐 잔잔하고도 깊은 '기쁨'으로 되어 되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나니, 가끔씩 내 인사에 답을 않는다거나 약간 의심스런 표정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을 만나도, 전혀 내가 속상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뿐 아니다. 거리에서나 어디에서 꽁초를 버리거나 휴지를 버리는 등 기초질서를 어지럽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을 만나더라도 기분이 나빠지거나, 마음의 불평 없이 대하거나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부터, 등산 자체가 기다려지는 행복한 일이 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든가, 작년부터 시 당국에서 등산로에 간간히 ‘먼저 인사합시다!’는 취지의 표어 현수막을 걸어두었다. 요즈음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 인사에 답 하고 지나간다. 오늘도 나는 만나는 이들에게 인사한다.

  "반갑습니다!"


'아름답기 > 수필 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월  (0) 2008.03.06
고추모종  (0) 2008.02.08
양학동 등산로[6](장안선녀)  (0) 2007.09.03
양학동 등산로 [5](외로운 나무)  (0) 2007.05.07
양학동 등산로[4] (태풍)  (0) 2007.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