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양학동 등산로[4] (태풍)

보니별 2007. 3. 23. 11:37
 

                                양학동 등산로[4] (태풍)

                                                     

                                                                                강길수(姜吉壽)

 

 처음 보는 엄청난 황톳물이다. 달려드는 거대한 괴물 같다. 삽시간에 냇둑을 잘라내고 논을 휩쓴다. 어른들은 남은 냇둑에 안간힘으로 큰 나무를 베어다 대는 작업에 열심이다. 하지만, 범람하는 냇물의 힘을 막아내기엔 어림없다. 남은 둑이 뚝 잘려 나간다. 집채 같은 토사가 논을 덮는다. 다 여문 볏논이 하루 만에 냇바닥으로 변해버린 기막힌 상황. 어른들은 넋을 잃는다. 며칠 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양학동 등산로를 오르며 떠오른 어린시절 태풍 ‘사라호’ 때의 기억이다.

 입구에서부터 숲은 생채기가 처절하다. 경사진 등산길이 빗물에 움푹 파여 새 도랑이 생겨났다. 나무들은 잎들을 많이도 잃었다. 찢어진 나뭇가지도 많다. 이따금씩 수십 년은 자랐을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있다. 태풍의 우악스런 힘을 보는 듯하다. 어수선하다. 그러나 텅 빈 것 같다. 새 도랑에는 아직도 빗물이 졸졸 내려온다. 등산길엔 떨어져 마르기 시작하는 여러 종의 푸른 나뭇잎들이 발에 밟힌다.

 마음 아프다. 푸른 낙엽과, 쓰러진 커다란 나무와, 찢어져 매달린 나뭇가지들의  죽어가고 있는 모습들이. 슬프다. 낙엽과, 쓰러진 나무와, 찢어진 나뭇가지들의 다 하지 못한 한살이가. 쓸쓸하다. 푸른 낙엽을 생잡이로 앞당겨 밟고 있는 내 발걸음과, 가을이라 일컫기엔 아직은 이른 양력 구월구일의 소슬한 바람이.

 하늘의 노여움인가. 바다의 시샘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업자득인가. 하루 새에 불어 닥친 태풍. 그 엄청난 힘이 휩쓸고 지나간 처절한 이 자리. 널려있는 나무 분신들의 주검. 한 마리 순한 양처럼 살던 나무들. 그들이 왜 저렇게 희생되어야 할까. 나를, 인간을 대신한 주검들 이란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문화발달’이라는 명분을 내 건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훼손과 화석연료의 사용행태…. 그 것이 지구온난화를 가져왔다고 하는 기상연구자들의 말이 생각난다. 온난화는 ‘엘리뇨현상’을 불러오고, 그 것은 초강력태풍을 만들뿐 아니라, 국지적 게릴라성폭우를 가진 더 많은 태풍을 발생시킨다한다. 그러니 죽어가는 저 나무와 낙엽들에는 인간의 욕망이 독소처럼 퍼져있을지도 모른다.

 태풍 사라호를 겪을 때의 내 어린 마음이 생각난다. 포효하는 비바람의 무서운 힘에 대한 두려움. 온 들을 삼킬 듯이 흉포한 괴물 같이 달려드는 엄청난 황톳물의 공포. 그 와중에도 황톳물 흘러 닿는 곳, 아름다운 푸른 바다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이 교차하던 치기어린 소년의 마음….

 이후, 산골마을에는 처음 보는 커다란 불도저가 나타났다. 굉음을 내며 불도저는 묻히거나 유실된 논과 냇둑의 복구 작업을 쉽게도 해냈다. 그 모습이 신기하여 작업장에서 오랜 시간씩 벗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불도저의 작업광경은 그때 까지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 곧 기계문명의 새 세계를 어린 소년들에게 보여주었다.

 ‘태풍과 불도저!’ 그랬다. 어린 내 눈에 비친 것은 태풍과 불도저의 대결이었다. 처음에는 ‘저 많은 흙더미를 언제 다 치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내려가 없어진 냇둑과 토사에 덮였던 논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듬해는 전처럼 모를 심었다. 그 후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들과 냇둑의 모습은 예전처럼 되돌아갔다.

 여전히 내 발은 구월 초순의 햇볕에 말라가는 푸른 낙엽을 밟고 걷고 있다. 낙엽 밟히는 소리가 어석거린다. 제 삶을 다 살고 늦가을에 떨어져 아삭거리며 밟히는 낙엽의 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소슬한 바람이 손끝을 지난다. 시리다. 낙엽은 소리 없이 등산길 바닥에서 제 삶을 마감하고 있다. 낙엽을 비켜서 걸어본다. 한가위에 휘몰아치던 사라호 태풍 때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범람하는 황톳물에 냇둑과 논은 무참히도 당한다. 순식간에 냇둑은 사라지고 논은 냇바닥으로 변한다. 왜, 무엇 때문에 자연은, 그 안의 돌, 흙, 풀, 나무, 꽃들은 태풍의 위해를 말없이 당하고만 있을까. 내가 아둔해서 그들의 외침을, 몸부림을, 반항을, 대항을 못 듣고, 못 느끼는가. 아니면 내 맘의 파동(波動)이 그들과 달라서일까.

 무한하다는 우주를 생각해 본다. 그 안에 존재하는 나와 저 낙엽은 무엇이 다를까. 학습되어진 나는 말한다. ‘크기, 무게, 부피, 움직임, 수명, 믿음, 희망, 사랑, 지성(知性), 정감(情感), 정의(正義), 진리, 참다움, 착함, 아름다움, 윤리, 도덕, 마음, 영혼…, 이런 것들이 낙엽과는 다르다’고. 또, 무엇보다 자연이나 창조주의 프로그램이

다르게 되어있다고.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알 수 없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달라? 한 생을 살고나면, 똑같이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소슬한 바람이 손끝에 더 시리다. 푸른 낙엽을 밟는 내 발소리만 서걱거릴 뿐, 숲은 조용하다. 한줄기 소슬바람에 나뭇잎 몇 개가 발길 앞에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말이 없다. 문득, 신비롭게 보인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깨달은 만유인력보다도 더 신비롭다싶다. 산은 가련한 낙엽을 자기품안에 고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머님의 품처럼…. 태풍 ‘사라호’의 엄청난 황톳물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냇둑과 논의 옛 광경이, 떨어지는 나뭇잎의 모습에 오버랩 된다. 나는 혼잣말로 말했다.

 “그래. 그렇구나! 자연은 무엇이든 서로 받아들이고 있네!”

 그러고 보니 산은 낙엽을, 낙엽은 태풍을, 태풍은 기압 차(差)를, 기압 차는 태양열이나 다른 열과 엘리뇨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이 저렇게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저 ‘받아들임’의 신비한 선물이라 싶다. 

 떨어지는 낙엽 위로 하늘이 푸르다. 텅 비어 참 아름답다.



     2007. 3. 23.


( '에세이 21'  2007.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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