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자메시지
강길수(姜吉壽)
“존재의 근원, 그리고 삶의 이유! 말 되남유? ㅎㅎㅎ.”
내가 보낸 휴대폰 문자메시지 내용이다. 칠월 하순 한 나른한 오후, 늦깎이 국문학도인 내게 어느 후배가 느닷없이,
“선배님,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라고 보내온 휴대폰 문자메시지의 답신이다.
밤 조용한 시간에, 오후에 있었던 메시지 생각이 새삼스럽게 다시 났다. 갑자기 받은 질문에 즉흥적으로 ‘만물(萬物)이 왜 있으며, 사람은 왜 사느냐?’ 하는 생의 근본문제를 메시지에서 졸지에 거론하고 만 것이다. 만일, 그 후배가 훗날 내가 보낸 메시지의 의미를 설명해달라고 청하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존재의 근원(根源)은 무엇일까? 얼마 전,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물리학계의 석학들과 대학생들과의 대담 프로그램을 보았다. 현대물리학을 전공한 교수가 주제설명을 한 뒤에,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이렇다. 우리가 물질의 최소단위라고 아는 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 같은 미립자 속에도 더 작은 존재가 있다. 그 존재 속에도 ‘리본’형태의 무엇이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 과학자들이 알아냈다. 과학은 현재 여기까지만 알아냈을 뿐, 그 것이 무엇인지, 왜 그런 형태와 운동을 하는지 모른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물질의 최소단위는 현대물리학도 모른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성(知性)을 가진 인간인 내가 궁극적으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현상(現象)의 일부를 알 뿐이다. 만나는 대상에게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모습과 움직임, 말과 소리, 냄새와 감촉, 느낌 등이 전부다. 이러한 현상(現狀)은 인간이 무(無)에서 어떤 존재를 만들어 내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먹고 일하고 자며,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미워하고 악행하고 죄지으며. 앎과 정(情)과 옳음, 진실과 착함과 아름다움 등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우리 삶의 근원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나의 무지(無知)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나름대로 존재의 근원에 대해 설명은 하지만, 아직 종교는 ‘믿음(信仰)’과 ‘수행(修行)’에, 철학과 과학은 ‘설(說)’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너와 나, 사물과 자연과 우주와 나, 이러한 존재들과 그 관계의 뿌리를 알 수 없는 내 실존(實存)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한다.
이글거리는 태양, 해맑은 달, 반짝이는 별, 우리가 타고 살며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지구라는 푸른 행성…. 푸른 하늘, 일렁이는 바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 짙푸른 나무와 아름다운 꽃, 풀과 곡식과 푸성귀와 약초들, 온갖 동물과 어여쁜 곤충과 미생물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공허감이 나를 외롭게 한다.
나는 이렇게 존재론적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만 살아야 할 숙명이란 말인가?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며,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낮에 후배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의 내용이 그 해답으로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나는 물질이 어떻게 하여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하며 생식(生殖)하고 죽는지는 안다. 사람을 정점으로 하는 생태계 대부분의 종들은 바로 이성(異性)간의 사랑을 통해 생명으로 태어나고, 자라며, 대를 이어 간다. 이와 같은 생명현상의 이치를 따져보면, 생명의 근원이 바로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태어났고, 아버지는 조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태어나셨고, 할아버지는 증조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태어나셨고…, 이렇게 생명의 근거(根據)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생명의 원인이다.
그렇다. 생명의 근원은 사랑이다! 사랑이 생명의 근원이고, 생명체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면, 생명체를 구성하는 물질도,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존재도 바로 사랑이 그 근원이 되어야만 한다. 한 이삭의 여러 낱알이 한 알의 씨앗에서 비롯되듯, 물질과 생명체란 낱알들로 이루어진 이삭인 만물도 사랑이란 한 씨앗에서 비롯됨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또한 물질의 원인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아가페니, 에로스니, 필리아니 또는 무엇, 무엇이니 하면서 나누지만, 그것은 같은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설명할 뿐이라 여긴다. 만일, 창조주 신(神)이나 본래적(本來的)인 우주가 있고 그 자체가 사랑이라면, 그 것은 우리 인간이 여러 종류 로 나누어 설명하는 모든 사랑은 물론, 물질과 생명, 그리고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나누어 설명하는 사랑도, 다른 모든 것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존재의 근원이다.
나는 사랑을 통해 세상에 왔고, 매순간 사랑을 숨쉬며, 끼니마다 사랑을 먹으며 산다.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식탁에 올려진 음식물중 생명이 아니었던 것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를. 내가 먹는 각종 곡식과 야채와 과일과 약용식물과 향신료들, 유제품과 생선과 육류와 주류와 음료들……. 그 모든 것들은 바로 사랑으로부터 온 생명체다. 사랑의 결과다. 사랑자체다. 그 뿐 아니라 내가 마시는 물과 숨쉬는 공기, 입는 옷들, 사는 집, 걷는 거리, 바라보는 자연, 우주도 사랑의 결과다.
내가 먹는 음식물들은 아픔과 슬픔을 묵묵히 당하면서 나를 위해 자기를 바친다. 살이 되고, 피가 되어 나를 살린다. 먹으면 내가 살고, 먹히면 다른 존재를 살리며, 죽으면 미생물이 분해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이 기막힌 삶의 비극적 진실을 나는 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생태계에 엄존하는 자기희생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통한 부활(復活)의 신비! 이 신비가 어찌 ‘약육강식’이란 간단한 도식적(圖式的) 설명으로 그쳐야만 하겠는가? 사랑! 오직, 사랑만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존재의 보편적 섭리(攝理)요, 드라마다. 그러므로 사랑은 삶의 이유다.
온 누리에 가득 찬 이 사랑의 법칙은 나를 전율케 한다. 생명을, 자연을 외경(畏敬)하게 한다.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서 지구, 달, 별, 태양,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내 몸과 같이 귀하게 느껴지게 한다. 삼라만상이 고맙기만 하다.
이렇듯 충만한 ‘사랑’ 속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어주자. 식물이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주듯, 나를 이웃과 자연에게 내어주자. 찾아오는 대상에겐 물론, 필요한 곳에 찾아가서 받은 사랑을 나누어 주자. 가진 것과 시간과 노력을 나누어 주자.
죽음이 나를 거두어 자연으로 돌려보내기까지 스스로 찾아가 기쁘게 사랑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체성사(聖體聖事)로 자기 몸을 밥으로 내어주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고, 고타마 붓다가 기꺼이 고행과 자비행(慈悲行)을 하듯, 그런 보편적 사랑을 본받고 싶다. 사랑이 바로 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고 싶다. 사랑이고 싶다.
내가 이웃의 사랑을 먹고 살듯이 또한, 내가 이웃에게 먹혀주는 사랑이 되는 삶이고 싶다. 그리하여 ‘존재의 근원, 그리고 삶의 이유’를 아는 삶, ‘사랑’으로 살아내는 내 삶이고 싶다.
휴대폰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사랑’을 새롭게 일깨워준 후배가 참 고맙다.
2005.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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