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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학동 등산로 [5](외로운 나무)

보니별 2007. 5. 7. 01:34
 

                              양학동 등산로 [5](외로운 나무)


                                                                                          강길수(姜吉壽)

 

 그대….

 나는 지금 한 나뭇등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가지가 다 잘려나가고 죽어 둥치만 뎅그러니 서 있는 모습입니다. 젊은 날의 추억으로 인해 ‘외로운 나무’로 부르고 있는 나무지요. 오늘은 왠지 이 나무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내 눈으로 이 나무를 보았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무가 이 자리에 턱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 산에 등산을 시작하고 나서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지요. ‘왜 그리 되었냐’고요? 글쎄, 왜 그럴까요? 아마도 그 시절, 내가 마음의 눈이 멀어있었나 봅니다. 우리 사람들의 감각기관이 감지 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무수한 현상과 정보의 아주 일부분이란 사실을 말하고 싶어요. 그래야 작은 위안이라도 될 테니까요. 이러한 사실은 속속 과학으로 증명되고 있다는 것을 그대도 잘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고 하는 오감(五感)이란 우리 감각능력의 영역이 그러할 진데, 마음의 영역에 있어서야 우리가 느끼는 것이 얼마나 미미할 것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이런 마음이 들면, 존재란 무엇인지, 인간이란 무엇이며, 왜 세상에 왔는지? 그리고 나란 자아와 내가 가진 것의 차이는 무엇이고, 내 내부의 소리는 또 무엇인지? 생명들은, 왜, 어떻게 살며, 어디로 가는지? 그 안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지…? 등등을 저절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대.

 얘기가 엇길로 나갔지요? 미안해요. 아무튼, 내가 처음 이 나무를 안 것은 벚꽃이 만발하던 어느 화창한 봄 날 오후였어요. 땀을 흘리며 내가 스스로 정한 반환점인 ‘연화(連花)재’ 산봉우리, 바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느 고마운 분들이 나무 그늘 밑에  마련하여 놓은 서까래 벤치에 앉아 큰 숨을 쉬며 땀을 닦았습니다. 그때 문득 바라본 하늘엔, 큰 벚꽃나무에 핀 아름다운 벚꽃이 살랑대며 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듯 현란했었지요.

  “어! 여기에 이렇게 큰 벚꽃 나무가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며 비로소 자세히 나무와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로 지척에 흉물스런 나뭇등걸 하나가 외로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지가 모두 잘리고 죽어 밑둥치만 검게 풍화한 체 말입니다. 몸통엔 어떤 사람들의 발길질에 차인 흙 묻은 흔적이 보였습니다. 나는 유심히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먼저 나의 무심함을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대자연을 다 생명으로 보고 귀하게 대하리라 하던 네 마음도 한 낱 사치스런 감정에 불과했지 않느냐?’고….

 그러자 내 마음은 아득한 미로 속을 헤매듯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날, 한 군사학교에서 훈련 받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초여름의 뙤약볕 아래 ‘선착순’이란 기합(氣合)을 받고 있었지요. 몸의 힘든 고통에 대한 자기인내의 한계와 맞닥뜨리면서 필사의 힘을 다해 뛰는 후보생들 틈에 끼어있던 나. 꼭 이 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홀로 흉물스레 훈련장 한 귀퉁이에 외로이 버티고 서 있던 커다란 검은 나무. 이름 하여 ‘외로운 나무!’ 숨을 헐떡이며 수없이 외로운 나무를 뛰어 돌던 우리들. 타오르는 갈증과 흠뻑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된 것 같은 육신의 고통. 혼자라면 죽인다 해도 못할 것 같은 고통을 절절히 느끼면서도 동료들과의 집단심리 때문에 억지로 뛰고 있음을 알아채는 비애. 이해 못할 군인, 나아가 인간의 숙명. 그러면서도 당장 내가 먼저 도착해야 육신의 고통을 면할 수 있다는 절박한 이기심.

 교관이나 조교의 입에서 걸핏하면 튀어나오는 ‘애국심, 부모형제, 국방의 의무….’ 그런 것들은 생각날 겨를도 없을 뿐 아니라, 한낱 사치스런 외침일 따름이었습니다. 그저 허공으로 날아갈 뿐이었지요.  단지, 지금 조교의 입에서 떨어지는 명령을 잘 수행해 숨 넘어 갈 듯한 이 육신의 고통을 빨리 면하겠다는 갈망뿐이었지요. 덩치만 작지 모양이 그때의 나무와 흡사한 이 나무를 나는 역시 ‘외로운 나무’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슬프도록 찬란한 사월의 날씨 아래, 연화재 봉우리에 현란하게 피어오른 벚꽃, 그 옆에 세상고통의 상징인양 떡 버티고 선 흉물스런 외로운 나무. 묘하다 못해 벚꽃과 신비스런 대비를 이루는 외로운 나무. 껍질이 반 쯤 일어나며 검게 풍화되어 다닥다닥 붙은 나무등걸. 게다가 건강을 위한답시고 무심한 사람들이 발길질로 걷어찬 흙 묻은 흔적…. 이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후벼 파고 휘저었습니다.

 그대.

 스무 한 살 꽃다운 젊은 날의 그 군사학교 훈련장 한 모퉁이. 그 곳에 괴물처럼 턱 버티고 서서, 마치도 인간의 운명과 젊음을 조롱이라도 하듯 노려보고 있던 ‘외로운 나무…!’ 가지는 다 잘리고 껍질만 다닥다닥 붙은 채 검게 죽어 외로이 서 있는 나무. 그 것은 내겐 알 수 없이 실존하는 거대한 괴물이었습니다.

 “선착순 1명, 뛰어 갓!”하는 조교의 구령은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명령이었다면 그대는 이해하련지요? 집단의 힘, 군중심리의 무서움, 그리고 다음엔 꼭 고통을 면하겠다는 내 본능적 이기심….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뒤죽박죽 교차되고 뒤범벅이 되는 그 곳. 아니, 어쩌면 이 세상 가득히 차 있으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 아마도 비물질적인 존재가 있어, 바로 저 검은 외로운 나무로 화신(化身)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대.

 나는 불행하게도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 외로운 나무의 딱딱한 껍질도 수 없이 돌고 도는 우리 후보생들 손바닥과의 마찰에 다 닳아 중간 부분은 매끈하게 단장을 하고 있었지요. 창조주, 신, 악마, 선, 악, 영혼, 구원, 깨달음, 은총, 윤회, 무의식, 리비도, 데자뷔, 정의, 진리, 무한, 그리고 또 무엇, 무엇….' 내가 아는 관념과 개념을 다 동원 해 보아도 나는 불쌍하게도 아직 그 존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대.

 무슨 고리타분한 철학 강의를 하려 하냐고요? 글쎄, 나도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한 게 또한 사실인데도 말입니다. 집요하게 내 뇌리를 파고드는 생각엔 그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진리 내지 진실을 추구하도록 운명 지워진 인간의 숙명을 회피하는 것 같고, 우리가 그렇게 안이하게 살아간다면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 같으니 난들 어찌합니까? 얄궂은 운명이라고요? 그래요. 인간은 이 지구란 푸른 행성에서 다른 생명들과 살면서 주인 노릇을 향해 줄달음쳐 왔습니다. 그러나 그 유전자가 작은 초파리에 비해 불과 일 퍼센트 정도만이 다르다는 엄연한 과학적 사실을 그대도 아시듯이 최근에야 알게 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온 유일한 생명의 한 종(種)으로서의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라 여깁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대?

 그러니 어찌합니까? 숙명대로, 운명대로 살아 낼 수밖에요. 젊은 날, 마음으로 무척 가까웠던 그리운 어떤 벗의 말이 이 시간 생각납니다.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 한다….”

 그대….

 그래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거의 오는 이 양학동 등산로에서 젊은 날의 ‘외로운 나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헷갈리며 어리둥절하게 돌아가는 이십 일 세기 벽두. 이 시기를 살아내며, 그래도 이 연화재 봉우리에서 나의 ‘외로운 나무’를 만나 인간 실존과 맞닥뜨리는 호사스런 고독을 누립니다. 내가 아닌 것, 내가 가진 것을 나로 착각하는 것들을 기도하듯 비우는 작업을 할 수 있음 또한 행복입니다. 외로운 나무와 작별 할 시간이면, 나는 다음 만남을 기약합니다. 그리곤 다음 행복을 꿈꾼다오.

 그대!

 오월의 신록처럼 늘 건강하고 기쁜 나날이길 비오.

 


       2007.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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