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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학동 등산로[3] (낯선 길)

보니별 2007. 2. 6. 00:53

 

                           양학동 등산로[3] (낯선 길)

                                                                        

                                                                                강길수(姜吉壽)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아래 작은 우산 하나 달랑 들고 전처럼 양학동 등산길을 나섰다.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며칠 전 휴일에 옥계(玉溪)에 가느라고 걷지 못해서 그런지 몸이 찌뿌듯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올 때만해도 비가 모자라 한산해 보이던 풀밭길이, 그동안 비가 와 어찌나 무성해 졌는지 금방 뱀이라도 스르르 기어 나올 것만 같다. 길섶에 간혹 있는 긴 덩굴딸기가지엔 빨갛게 딸기 따 먹은 흔적들만 무수해서 조금 섭섭하다. 우리 고향에선 그 딸기를 '송아지딸'이라 한다. 어린시절, 모 심을 무렵이면 논길 가, 밭길 옆에서 정신없이 송아지딸을 따 먹던 기억이 새롭다. 미로를 해매 듯 덩굴을 뒤지며 따 먹던 딸기, 산딸기보다 훨씬 크고 맛 좋은 송아지딸이었다. 그래도 두어 군데서 몇 개의 설익은 송아지딸을 따 맛을 보았으니, 오늘의 양학동 등산길도 이로써 행복하다.

 내려오는 길은 골짜기 길을 택했다. 도중에 천수답 작은 논다랑이 셋을 만나는 길이다. 논다랑이에는 물이 부족하여 모를 심은 기간이 각기 달라, 자라는 벼들의 색깔이 연록에서 진초록까지 섞여 진풍경을 이루고 있다. 지난봄과 초여름의 가물었던 날씨와, 혼자서 농사짓던 노인장의 애환이 느껴진다. 가끔 이 길을 지날 때, 혼자 일하시는 노인장을 만날 수 있었고, 그 분께 말을 걸어 몇 마디씩 나누기도 했었다. 여기서 대대로 농사지으며 사셨던 분이셨다. 경운기를 다루기에도 벅찰 정도로 연로하신 분이 자기가 걸어 온 길이기에, 혼자서 논다랑이 셋을 알뜰살뜰 가꾸시는 모습에 고향에 온 듯 감동을 받곤 했다.

 내가 처음 이 양학동등산길에 오른 것은 지난 팔십 년대 중반,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다. 그 때는 인근 아파트의 가까운 봉우리에만 이따금씩 한두 사람이 오르내릴 뿐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오던 것이 고작인 그때, 이 산에는 가까운 곳은 한 사람이 다니는 정도의 작은 오솔길이 있을 뿐, 좀 멀리 가면 사람 다닌 흔적이 거의 없는 산이었다. 그러던 것이 아이엠에프 경제관리체제가 터지고 난 다음해부터 사람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그랬을 것이다. 그러자 산에는 그 위치나 구조에 따라 다른 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는 넓은 길이, 먼 곳에는 좁은 길이 생기고, 장애물 없는 곳에는 곧은길이, 장애물 있는 곳에는 돌아가는 길이 생겼다. 또 골짜기나 등성이마다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곳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생겨났다.

 없던 길이 사람이 다니기 시작하니까 생겨나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 오늘 따라 내게는 낯설어 보인다. 그보다 더 낯선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며 서로 마주치거나, 앞지르거나 뒤처져도 이 길 위에서는 서로 다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 길이니 네 길이니,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내가 비켜야 되느니 네가 비켜야 되느니 하며 다투거나 싸움질하지 않았다. 푸른 나무와 풀들이 사이좋게 제 자리를 잡고서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에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산을 닮아서일까. 아니면 돈 버는 길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늘 오가던 이 길이 오늘따라 전혀 낯선 길로 보인다.

 내가 이제껏 걸어왔고, 지금 걷고 있는 인생길은 이 길과 닮았을까. 우리가족, 친지, 지인(知人), 우리국가사회 사람들의 길은 이 길에 가까울까. 그리고 태양을 초속 삼십 킬로미터로 공전하면서, 우리 은하계 우주 길을 초속 이백육십 킬로미터의 가공할 속도로 비행한다는 지구호(地球號)란 우주선에 태워져, 지구촌을 이루어 살아가는 인류의 길은 이 길에 비춰보면 또 어떨까.

 저절로 고개가 흔들어진다. 나와 모든 사람들이 걷고 있는 인생길은, 이 산의 길과는 너무나 다른 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정, 비리, 사기, 모함, 협잡, 권모술수, 착취, 억압, 여론몰이, 대립, 갈등, 투쟁, 테러, 전쟁 등 온갖 미움과 속임, 외면(外面)과 다툼과 싸움으로 점철된 길. 고통과 희생의 길. 비극의 길인 인간의 길…….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이 절규하는 인생길이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것 같다. 태어나 살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먹고 살기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다고 자기도 모르게 학습되어진 현대인들의 길. ‘자유’, ‘평등’, ‘민주’, ‘정의’, ‘노사협조’, ‘평화’와 같은 깃발들이 펄럭거려야 할 깃봉에는 ‘이기(利己)’, ‘패권’, ‘횡포자본’, ‘대중영합’, ‘독단’, ‘양극화’, ‘귀족노조’, ‘전쟁’과 같은 깃발들만 의기양양할 뿐이다.

 이런 내 마음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오르막길에는 사람들의 발길에 파인 흙 속에서 굵은 참나무 뿌리가 핏줄처럼 드러나 있다. 참나무는 자기 뿌리를 산 속에 내리고 살면서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산에게 선물하고, 산은 자기 몸을 참나무에게 내어주어 살게 하고 있다. 산은 오가는 사람들에게 길이 되어주고, 참나무는 버팀나무와 계단이 되어주고 있다. 사람들뿐 아니라, 산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산은 자기를 내어주고, 식물들은 곤충과 동물들과 사람들의 먹이로 혹은, 재료로 자기를 내어주며 말없이 제 길을 걷고 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길, 서로 자기를 내어주기에 다툼 없는 낯선 길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낯선 길이 어디 이 양학동 등산로뿐일까. 사람을 뺀 온 누리에 사는 온갖 생명체는 물론, 보이지 않는 섭리의 길을 걷고 있는 자연이 바로 인간에게 보여주는 다툼 없는 낯선 길이라 싶다.

  길섶 덩굴딸기가지에 붉은 송아지딸 하나가 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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