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삼월

보니별 2008. 3. 6. 23:42
 

                                                삼월

                                                                                                       강길수


   나는 삼월과 연(緣)이 깊다. 음력으로 동짓달에 있는 생일을, 무슨 이유인지 양력 삼월일일로 출생신고를 아버지가 하셨다. 세상에 태어나서 두 달 만에 삼월과 공적으로 관련 지워진 것이다. 진짜생일 따로, 서류상생일 따로 인 삶을 산 것이다. 이 점은 그 시대에 태어난 많은 아이들이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철들고부터 내 호적상의 생일이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삼월 초하룻날이라는 사실이 싫지는 않았다. 나라의 기미독립운동기념일인 삼일절과 같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월 마지막 주에 경제적으로나 혹은, 온라인상에서 관련 있는 곳에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일이나 문자메시지가 왔었다. 때문에, 잊고 산 서류상의 생일과 더불어 삼월을 새삼 생각하며 맞게 되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삼월이며, 그 후에 다닌 학교도 모두 삼월에 입학하고 또, 새 학년으로 승급하였다. 이월에 군에 가고, 취직하고, 결혼했지만, 본격적인 군대생활도, 직장생활도, 결혼생활도 모두 삼월에 시작되었다. 그러니 내 삶의 중요한 일들이 삼월에 시작된 거다. 그 때문인지 삼월은 늘 무언가 새로 시작하는 들뜬 기분으로 맞으면서 살았다. 하지만, ‘작심삼일’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금껏 살아 온 것도 사실이다. 변변히 무엇 하나 이룬 바도 없이 세월만 보내며 생을 웬만큼 살아온 지금, 삼월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린시절의 삼월…. 집 앞 양지바른 밭두렁이다. 삼월이면 제일먼저 새싹들이 올라오는 곳이다. 바싹 마른 풀들 사이로, 돌 틈새로 혹은, 마른 흙을 뚫고 올라오는 연둣빛 새싹들이 날마다 얼마나 자라나는지를 가늠해 보는 곳이기도 하다. 보는 그날은 새싹들이 얼마나 커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음날은 분명 더 커 있음을 알아낼 때의 놀라움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새싹들의 이름을 알려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지내는 친구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쳐다보고 만지기도 하며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동네 뒷도랑. 따사한 가장자리에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작은 버들강아지가 하얗게 뽀송뽀송하다. 그 아래 작은 웅덩이 하나가 있다. 버들강아지나무뿌리 사이로 가는 물줄기가 보그르르 흘러내린다. 한 두레박만큼의 물이 고였다. 물속엔 새끼손가락크기의 투명한 개구리 알들이 꿈틀대듯 알집에서 깨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웅덩이 옆 커다란 돌들 틈엔 눈 녹은 물이 졸졸 흐른다. 저 쪽 덤불에서는 멧새 소리가 즐겁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아직은 조금 시리고도 따뜻하다. 개구리 알을 건져내 장난치려 나뭇가지를 찾다가 그만둔다. 혼자서는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알집 속에 검은 수정체처럼 맑게 들어있는 알들이 머지않아 올챙이로 변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금 기다리면 버들강아지를 따 먹어볼 수도 있겠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  수도 있겠다.

   바야흐로 삼월은 새봄을 시작하는 달이다. 해는 하늘에서 점차 높아지며 따사한 빛을 쏟아낸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땅의 온갖 생물이 기지개를 켜고 새 삶을 시작한다. 산에 쌓인 눈은 녹아 스며들고 흘러내려 생물들의 생명수가 된다. 낙엽 진 나뭇가지들은 눈이 부푼다. 사철 푸른 나무들이나 인동초 같은 사철식물들의 잎도 삼월엔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같은 이유로 사람들도 삼월을, 봄을 타는가 보다.

  이제껏 내가 알면서도 깨닫지 못한 삼월이 있었다. 바로 삼월은 이월, 나아가 겨울철과 헤어지는 달이라는 점이다. 삶이나 자연 질서에 있어서, 만나고 헤어짐은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온  것이다.  만일, 내가 앞만 보고 삼월을 좋아했던 젊은 날부터, 오는 삼월만 좋아하지 않고 가는 이월을, 겨울을 생각할 줄 알고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이성을 가졌다고 사물과 자연의 주인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 뻐기며 살아오지 않았을 게다. 내가 생각하는 존재인 이상, 오는 것과 가는 것, 비롯함과 마침, 낮과 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선과 악 같은 것들을 두루 헤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삼월은 새로운 시작이지만, 우리에게 가는 이월을, 가는 겨울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돌 틈에서, 마른 흙 속에서 혹은, 말라 아삭하게 스러져 가는 풀잎 속에서 돋아나는 연두색 여린 새싹들과, 도랑 가 따사한 가장자리에서 뽀송뽀송하게 피어나는 버들강아지처럼 깨어나는 삼월의 자연…. 그들이 한줄기 따뜻한 삼월의 바람에 실려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깨닫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삼월 초하룻날의 햇살이 참 따사롭다.


   

  200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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