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보이지 않는 등록금

보니별 2008. 3. 15. 10:49
 

                                               보이지 않는 등록금

                                                                       강길수

 

  버스에 올랐다. 두 시간 정도 가야 하기에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는다. 오늘 받을 수업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몸이 천근같이 무겁다. 오늘이 실험실 콘크리트 바닥에 헌 골판지를 깔고 회사 근무복을 입은 체, 쪼그리고 누워 토끼잠을 잔지 일주일째다. 그러니 아무리 젊고 건강한들 어찌 피곤하지 않겠는가. 강의를 마치고 부랴부랴 도착하여 식당에서 후딱 저녁 한 그릇 비우고 나면 저녁 일곱 시 경. 자전거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는 시간은 일곱 시 반경이다. 그날 해야 할 제품의 실험을 끝내고, 일지 정리를 마치는 시간은 보통 자정을 넘어선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토끼잠을 청한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야한다. 그래야 집에 와서 책 챙기고 세수하고 여섯 시 반에는 시외버스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은 차 안에서 빵과 우유로 때운다. 그나마 기말시험기간에는 정기휴가의 일부를 쓰기 때문에, 밤에 출근하여 일을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군 생활을 마치고 한 공기업에 공채사원으로 입사한 첫해, 여름방학기간 중에 십 여 일 동안 내가 살았던 삶의 모습이다. 입사와 동시에 주경야독의 대학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방송강의와 출석수업제도를 병행하는 교과과정의 공부였다. 신입사원시절 두 해 동안, 여름과 겨울 방학기간에 있는 출석수업을 이처럼 자기 담당 일을 밤에 처리하면서 받았다. 동료들과 상사의 도움도 컸다. 낮에 나를 위해 샘플을 대신 떠 준다든가, 때로는 대근(代勤)도 해 주었다. 물론, 대근은 후일 갚아 근무해주었고 그들이 내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와주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새마을 운동’이 정부 주도하에 요원의 불길처럼 온 나라에 희망으로 타오르던 때였다. 국민에게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새마을 노래’가 거리마다 학교마다 직장마다 울려 퍼졌다. 마지막 절 가사에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라는 구절이 있다. 대다수 국민들의 삶이 이 노래가사와 닮았었다. 그때 내 삶은 오히려 가사에 하나 더 붙여 ‘싸우면서 일하며 공부하고, 일하면서 공부하고 싸워서’라고 해야 꼭 맞는 삶을 산 것이다. 낮에는 신입사원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하는 용광로 제철공업의 한 실험실에서 부지런히 일했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으며, 나라의 부름에 따라 예비군 훈련도 빠짐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같은 대학에 학사과정이 개설되어 같은 길을 걸어 두 학과의 학사과정을 마쳤다. 연이어서 공부하지 않고 형편에 따라 했기에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도 그동안 함께 흘렀다.

 

  안방 책꽂이 뒤에는 공공칠가방 하나가 있다. 전에 출퇴근용으로 쓰던 것이다. 가방 안에는 모 대학 대학원 지원서가 학생모집요강과 함께 지금도 고이 들어 있다. 십 오년이나 지난 것이다. 삼십대 중반에 주경야독으로 첫 학사과정을 마치고, 대학원 입학을 고려해 보았으나, 지역상 직장과 병행하기 어려웠다. 전공도 마땅치 않아 여러 해 망설이다가 미련을 버리지 못해, 원서를 사 막상 지원하려 하니 현실적인 문제와 부딪쳐 대학원 진학은 미뤄졌다. 바로 등록금 문제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상황이니, 아내의 우려를 무릅쓰고 대학원행을 강행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대학원 마치면 돈 벌이에 도움이 되느냐는 명제 앞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가 곤란했다.

 

  되돌아보면, 자신이 번 돈으로 처음 대학 등록금을 낼 때의 감격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가정형편 때문에 실업계고등학교를 택한 이래, 늘 가슴 깊은 곳에 응어리처럼 엉켜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비록 칠년 늦게나마 이루어지던 벅찬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등록창구에서 만났던 만학도(晩學徒)들의 결연한 눈동자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았으나 몇 번 낙방했다가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서, 과장에 들어서는 옛 선비의 눈동자가 그랬을까. 자기가 번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얻은 학생신분은, 가장이며 직장인이자 사회인으로서 일인 다역의 역할을 고되게 해내면서도 늘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배우기 위해 학교에 낸 보이는 등록금보다 더 큰 보이지 않는 등록금이 나에게는 있다. 보이는 등록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가 바친 역경의 시간과 힘겨운 노력들이 그것이다.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의 틈틈이 공부해야하는 것도 어려운데, 거의 독학하다시피 도합 칠년 반을 그렇게 살았다. 그 기간동안 직장에서 주어지는 휴가는 모두 보이지 않는 등록금으로 바쳐졌다. 내 가족들 특히, 아내의 큰 희생도 뒤따랐다. 넉넉지 못한 내 봉급을 아끼고 쪼개서 학자금을 만들어야 했고, 공부로 가족들의 단란한 시간도 줄여야 했다. 공부하는 동안 남들 다 가는 가족휴가 한 번 제대로 가지 못 한 것이다. 이 가족들의 희생 또한 보이지 않는 등록금인게다.

 

  결과만을 따지면 내 삶은 실패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등록금으로  따진다면 내 삶도 즐겁고 보람된 삶이라고 힘주어 말하련다. 지금도 내 옆구리엔 스물다섯의 젊은 날, 실험실 콘크리트 바닥에 웅크리고 토끼잠 자던 차가움이 오히려 뜨거움으로 남아있다. 보이지 않는 등록금으로 말이다.


 

  2008.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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