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강길수
“야야, 이것 좀 머 바라!”
어머니께서 바가지에 커다란 홍시 네다섯 개를 담아 내놓으며 한 말입니다.
“귀한 걸 집에나 먹지, 말라고 이때까지 나 둤노?”
저는 고마운 마음을, 이처럼 퉁명스럽게 대답 하면서 홍시 한 개를 집어 들었지요. 그리고는 어머니 가슴에 그만 아픈 못 하나 더 박아드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우리 집 마당에는 당신께서 아시듯,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한 나무에 두 종류의 감꽃이 피는 드문 나무였습니다. 대부분의 잔가지들에서는 감이 달리지 않는, 작고 조금 길어 초롱꽃처럼 생긴 감꽃이 참 많이도 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내려설라치면 간밤에 눈이라도 내린 듯, 하얗게 작은 감꽃이 빼곡히 떨어져 있었지요. 더 이상한 것은, 이 꽃의 맛은 다른 감꽃이 떫은 것과는 달리 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동기들은 어린시절 이 감꽃을 많이도 주워 먹었지요.
주로 높은 곳에, 작년 혹은 제 작년에 움터 자란 튼실한 새 가지에서는 드문드문 큰 감꽃이 피었습니다. 둘레 크기에 비해 길이가 짧게 납작한 꽃, 보통 감 달리는 나무들과 같은 모습의 꽃이지요. 이 꽃은 거의 땅에 떨어지지 않고, 수정되어 감이 커지기 시작하면 붙었던 자리에서 갈색으로 변하여 말라 없어졌습니다. 늦가을이 되어 감나무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모과처럼 길쭉하게 생겨 어른의 주먹만큼씩이나 큰 감이 몇 개씩 높은 새 가지에서 주홍 얼굴을 뽐내고 있었지요. 감 풍년이 드는 해는 수십 개의 감이 달렸으나, 흉년이 드는 해는 그 큰 나무에 몇 개의 감이 달릴 뿐이었으니 우리 집에서는 무척 귀한 감이었습니다.
어머니!
제가 몰랐던 홍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지요. 제가 철들었을 때 어머니가 자분자분 들려주신 얘기 말입니다. 두 살 땐가 제가 홍시를 너무 많이 먹어 그만 배변을 못하게 되었다지요. 스무 일곱 새댁은 꼭두새벽, 다 죽게 된 아들을 들춰 엎고 이십 리길 의원으로 내달려 살려내셨습니다. 그때 어머님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갔으며, 그 어두운 길이 얼마나 무섭고 먼 길인지 제가 감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등학교시절 저녁에 혼자 어머니가 달린 밤길을 걸어 본 일과, 어머니 큰손자 놈이 유아시절 휴일 날 포도를 잘못 먹고 열이 펄펄 뛰어 실신지경까지 가 본 일이 있어 조금 짐작을 할뿐입니다.
그 늦가을 토요일 날은 고향집에 꼭 가야하는데, 무슨 일이 있어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말았지요. 할 수 없어 집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 기차역으로 가 걸어가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한손에 묵주를 꼭 쥐고, 로사리오기도로 무서움을 달래며 어두운 산골짜기를 걸었습니다. 혼자 걷는 밤길이 그토록 사람을 긴장시키고 무서운 줄은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길을 젊은 새댁의 몸으로 달리면서 새벽길의 무서움 보다는 어린 아들을 잃을까봐 더 무서우셨을 테지요. 보나마나 그 일로 어머니는 시어머니께 호된 꾸중을 들으셨을 테고, 어머니 가슴에 어린 저는 그만 큰 못 하나 박아드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는 장손이라고 쟁기질이라든가 써레질 같은 고된 농사일을 못 배우게 했다지요. 그래선지 아버지는 벼 중상(中商) 일이라든가 개발위원, 동장 등 동네일을 더 많이 하셨지요. 그러니, 우리 집 농사일은 늘 삼촌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요. 이런 조건에서 농사지어 살면서 어머니께서 평생 받았을 어려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무던하고 정 많은 큰 삼촌께서 형님 집 일, 내 집 일 가리지 않고 자기일로 삼아 농사를 지으셨기에, 우리 가정은 동네에서도 형제간에 우애 깊은 집안으로 소문났었지요. 그렇지만, 그 뒤에는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손길과 정성, 인내와 한숨이 많이도 숨어있을 것임을 무심한 이 아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아주 가끔씩 아버지의 귀가가 늦으시는 날이었지요. 윗목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말없이 꽁초 한두 모금 피우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훔쳐보기도 했지요. 그 모습도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어머니!
이 아들이 본 어머니는 가슴에 용광로 하나를 가지고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당신의 가슴에서 녹여내시며 살았으니까요. 제 기억창고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어머니께서 제게 정색을 하고 꾸지람하거나 걱정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한, 속내를 슬하 아이들에게 드러낸 적도 물론 없었지요. 아버지께서는 벼 중상 일로, 동네 일로 또는, 가정일로 밖에서 약주를 거나하게 들고 늦게 집에 돌아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 날은 밤늦도록 아버지의 이야기만 자자하게 들릴 뿐,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손님도 단연 많았는데, 어머니는 언제나 성의껏 말없이 그들을 접대하셨습니다.
어머니!
당신께서 하늘나라로 가신지 벌써 일곱 해가 지난 지금, ‘어머니’를 주제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젖으며 먼저 생각난 것이 ‘홍시’였습니다. 아니, 어머니 가슴에 제가 박아드린 못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홍시를 입에 댔을 때, 홍시는 초로 조금 변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입에 물은 적은 량의 홍시를 억지로 삼키고는 투덜대며 더 이상 먹지를 않았지요. ‘이 정도 홍시는 먹어도 탈나지 않으니 먹어보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저는 화를 내며 무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못내 서운해 하면서도, 그날 당신도 끝내 그 홍시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훗날 동생들에게 주시려는 것일 거라 그때 저는 생각했지요.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 안에는 어릴 적의 제 홍시사건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 때도, 그 후에도 미련한 저는 전혀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홍시’들이 어머니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혀 있으리라고는,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시기까지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늘 요리조리 핑계 대며 제 살기 바쁠 뿐이었지요.
어머니!
홍시뿐만 아니라, 제가 모르는 많은 일들로 어머니 가슴에 박아드린 그 많은 못들을 다 어찌해야할까요? 그런 못 없으니 걱정 말고, 그저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면 된다고요? 그런데, 이 아들은 괜찮지가 않습니다. 제가 더 맛있는 홍시를 어머니께 드리고 싶어도 이젠 영영 드릴 수 없으니 말입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그리고 보고 싶어요.
2008.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