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기/발표 글-경북매일

희생의 강

보니별 2022. 3. 14. 10:04

                      등록일 2022.03.13 18:08                                   게재일 2022.03.14

 

이게 어찌 된 거지. 돌연변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이리 추운 겨울을 저 어린것이 밖에서 오롯이 버텨내다니. 모를 일이다. 아무리 기후변화 시대라지만, 올겨울도 영하 섭씨 7~8도를 넘나드는 날씨가 몇 번 지나갔는데 말이다.

 

성당 오가는 길목에 커다란 대문 앞을 지난다. 대문 양쪽에 벽돌을 쌓아 올려 허리춤쯤 높이에 작은 화단이 하나씩 있다. 나 같으면 그냥 벽돌 벽이나 콘크리트 벽으로 마감했을 공간인데, 집주인은 화단을 만들었다. 꽃이 피면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도록 적당한 높이도 배려하였다. 집주인의 꽃사랑이 화단으로 태어났기에, 오갈 땐 늘 기분이 좋아진다.

 

언제부턴가 양 화단에 탐스러운 장미들이 피어났다. 왼쪽에 장미 여남은 그루, 오른편에 일고여덟 그루가 살며 피워낸 꽃들이다. 붉은 장미, 노란 장미, 하얀 장미, 분홍장미, 흑장미 등 내가 본 장미의 종류가 다 망라되어 피었다. 다른 곳보다 유달리 크고 아름답게 피어 어우러진 여러 색깔의 장미꽃들을 처음엔 감탄하며 그냥 지나다녔다. ‘주인이 품종 좋은 것들만 골라 심었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점차 장미와 화단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어느 날, 고운 장미들이 일제히 오가는 이들을 반기는 이팔청춘의 얼굴들로 다가오기도 했다.

 

지난겨울, 강추위가 몰아치는 날 미사 가는 길에 눈이 화단에 끌렸다. 한데, 몸이 뎅강 잘려버려 한 뼘 정도 남은 장미 밑동들에 어린 장미잎이 살아 붙어 있는 게 아닌가. 담장 가까이에 있는 안 자른 두 그루의 줄기에는 산 잎도, 죽은 잎도 달리지 않았다. 두세 번의 강추위도 아랑곳없이 장미 밑동은 왜 눈 틔워 잎을 피워낸 걸까.

 

한겨울을 씩씩하게 이겨내는 여린 장미잎들의 모습이 돌아오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볼이 파랗게 얼다 못해 보라색으로 바뀌면서도 얼어 죽지 않은 잎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온 걸까. 장미 몸들을 무참히 잘라버린 정원사는, 장미의 삶을 통달한 건가. 처절히 교감한 걸까. 12월 하순까지 버티던 학교 담장의 장미꽃과 잎, 녹지의 풀들도 얼어 죽었는데, 이 어린 장미 잎들이 월동하다니.

 

제 몸이 힘센 날에 잘려 나가던 고통의 열기가, 잎을 피워내 얼지 않게 했을까. 잃은 몸을 다시 살리려는 몸부림이 혹한도 물리치는가. 아니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자기 몸을 잘라낸 인간에 대한 적개심의 발로일까. 인간은 농사지으며 유실수를 전지(剪枝)한다. 정원수, 관상수도 보기 좋게 잎과 가지를 잘라낸다. 들의 잡초도 제거한다. 먹기 위한 생명체의 행위는 다른 생명에게 고통과 희생을 강요한다. 나아가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도록 우리 지구 행성의 삶은 설계되어있다.

 

그렇다! 모든 삶은 고통과 죽음의 신비란 희생의 강을 따라 흐른다. 성당 가는 길목 화단의 장미들은 꽃을 피우라고 심어졌다. 제 몸이 싹둑 잘리는 고통과 줄기의 희생을, 원망도 없이 기꺼이 받아들여 살아내고 있다. 고통 속에 떠났을 장미의 희생은,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부활하는 디엔에이를 밑동에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장미 밑동은 새싹 잎을 내보내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고 있다. 장미꽃 새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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