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강길수 수필가 |
세상에는 알고 보면 겉보기와 다른 것들이 많다. 까마중도 그렇다.
지난 봄, 걸어서 출퇴근하는 길옆에 한 주택의 철거작업이 있었다. 중장비가 동원되더니 이틀만엔가 다 헐렸다. 빈터에는 산을 깎은 것으로 보이는 흙이 두툼하게 깔렸다. 새 흙이어서 당분간 풀도 없는 맨땅이겠구나 생각하고 관심 없이 지나다녔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도 봄비가 내린 다음 어떤 날이지 싶다. 새 땅에 어린 싹들이 많이도 돋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자라나자 새싹들이 까마중이란 것을 알았다. 신기했다. 까마중은 오륙십 평 되어 보이는 도시빈터의 절반가량을 차지하였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행운이다!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까마중을 만나다니, 그것도 도시빈터에서…. 올 한해는 출퇴근길을 까마중이 살아내는 모습 보며 심심찮게 지내겠구나!”
그랬다. 시골에서 자라났지만, 한 곳에 이렇게 많은 까마중이 서식하는 것은 본적이 없다.
어릴 때 우리 친구들은 까마중을 `개머루`라 불렀다. 아마 누군가 열매가 머루를 닮아 그렇게 부른 것이 이름이 되었지 싶다. 나중에야 표준어가 까마중임을 알았다. 그 외에 가마중, 강태, 깜푸라지, 먹딸기, 먹때꽐, 까마종 등 다양한 이름들도 있다는 것을 온라인으로 배웠다. 뿐만 아니라, 한약재나 나물로도 쓰인다는 사실도 알았다.
6·25 전쟁 직후, 보릿고개를 넘던 시골 아이들에게 까마중열매는 감칠맛 나는 주전부리였다. 길가, 밭둑, 담장 밑, 집 뒤란, 도랑 가 등 동네 주위에서 흔하게 만나던 까마중…. 여름부터 가을까지 까만 열매가 동자승머리같이 반질거리면, 아이들은 놀다가 수시로 따먹었다. 입안이 까맣게 변하도록 먹는 날은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탐스런 열매가 입안에서 톡 터지면, 맛세포로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맛이 일품이었다. 부주의로 덜 익은 열매가 입에 들어가 으깨질 때면, 온 입안을 콕콕 찔러대던 아릿한 맛이 톡톡 쏘는 사춘기소녀의 매력마냥 지금도 미뢰속에 남아있다.
어떤 연으로 도시빈터에 군락으로 살게 된 까마중은, 도회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의 존재인가보다. 정면에 철제펜스가 막고 있지만, 옆으로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그런데도 열매를 따 먹거나, 나물이나 약재로 쓰기 위해 채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 혼자만 비밀스레, 아침저녁으로 낯선 도시빈터에 태어난 까마중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며 봄, 여름, 가을을 지냈지 싶다. 새 땅에 거름기도 없을 텐데, 까마중은 무럭무럭 잘도 자라났다. 초겨울 까만 열매를 조롱조롱 많이 매달았어도, 할 일이 남았는지 하얀 꽃을 바지런히 피운다. 서리에 잎과 줄기가 검은 빛이 감돌고 일부 잎은 조금 말라도 개의치 않고, 겉보기와 달리 자기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
까마중도 우리나라처럼 노령화시대에 접어들어 노후준비가 덜 된 걸까. 아니면 지구촌의 기후변화 때문일까. 길가에 고인 물이 어는 초겨울 날에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으니 말이다.
연약해 보이지만, 여느 풀 못지않게 강인한 까마중. 혼자건, 여럿이건 따지지 않고 의연히 사는 까마중. 외진 곳과 번잡한 곳, 황무지와 비옥한 땅, 양지와 음지, 아스팔트나 콘크리트의 틈새 같은 곳을 묻지도, 가리지도 않고 잘도 살아내는 까마중….
까마중은 겸손하고 온유(溫柔)하며, 사랑과 부활을 사는 풀이다. 자신을 다른 생명에게 먹이로 내어주는 사랑을 행함으로써, 자신도 부활하는 삶을 사는 까마중이다.
까마중열매 몇 개를 따 입에 넣어본다. 맛이 옛날 그대로다.
초겨울 하루. 싸늘한 해가 서산을 베고 눕는 시각에도 까마중 하얀 꽃은, 집 헐린 도시빈터 가득 배시시 웃고 있다.
나도 까마중처럼 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