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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성당 가는 보도(步道)가 이별로 가득하다. 빨간 이별, 노란 이별, 보랏빛 이별, 푸르딩딩한 이별도 있다. 한 가족으로 봄에 태어나 살다가, 때가 차 나눈 이별들이 이처럼 서로서로 다르다니 웬 까닭일까.
이별들의 표, 낙엽을 밟으며 걷는 내 마음창고에 수많은 이별이 켜켜이 쌓인다. 가을이 깊다. 가로등 빛에 기력을 잃은 늦가을 열나흘 달이 벚나무 단풍잎 사이로 외롭다. 세상 만물은 어찌하여 헤어져야만 하는가. 사람은 물론 동식물, 미생물, 무생물, 심지어 행성과 항성, 은하계, 우주까지 이별로 점철되어 있다. 도대체 나는, 너는, 우리는 이 이별의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만 하는가.
창백한 달 앞에서 신성한 의식(儀式)이 시작되고 있다. 추운 겨울동안 가장(家長), 벚나무를 살리기 위해 잎이 제 몸을 스스로 자르는 낙엽이별의식이다. 빨간 이별인지, 노란 이별인지, 무슨 빛 이별인지 벚나무 뒤에 선 달은 내게 비춰주지 못한다. 슬프고도 결기 찼을 이별의 노래도 귀엔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의식은 준엄하게 진행된다. 낙엽이별노래의 끝소리가 `툭!`했는지, `우지직!` 맺었는지, 아니면 `짱!` 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벚나무 잎 하나가 가지를 떠나는 거룩한 낙엽이별의식은 끝이 났다. 잎은 뒤풀이 이별여행을 가려한다. 이른 봄, 날씨를 착각하고 나타난 나비의 서툰 날개 짓 마냥 팔랑팔랑 하늘을 날아서 먼 길을 떠난다. 하지만, 잎은 저만치 날아 저쪽 벚나무 둥치 옆 땅위에 풀썩 주저앉고 만다. 그래. 갈 곳이라곤 땅밖에 없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이 이별인 게야.
저 잎은 제 가장을 떠나 땅에 안착한 느낌이 어떨까. `이제 다 이루었다! 삶에 여한이 없다`싶을까. `대지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다시 돌아왔으니, 이젠 쉬고 싶다`라 할까. 아니면 `봄, 여름 가장을 위해 힘껏 일했다. 가을에도 가장이 겨울에 얼지 않는 영양분까지 만들어 주었으니, 이제 할일 다했다. 그러나 서럽다!`라 여길까.
이쪽 벚나무둥치 곁에 커다란 비닐봉지가 입을 벌리고 있다. 미화원이 가을 보도를 메운 낙엽을 쓸어 담다 말았나보다. 비닐봉지에 담긴 저 낙엽들에게는 무슨 운명이 다가오는가. 폐기물처리장에 묻히거나, 소각로에서 태워질 것이다. 왠지 비닐봉지 안의 낙엽들이 가엽다. 산야나 들에 앉았다면 다른 생명들로 다시 태어날텐데, 썩거나 불타버릴 운명에 처해졌으니 말이다.
벚나무 무성한 성당 가는 길은, 내겐 도시의 옹달샘이다. 진종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채워진 공간에서 살아내기 때문이다. 도시란 제대로 쳐다보면 숨 막히는 공간이다. 편리성을 담보로 자연도, 하늘도, 공기도 제약당한 채 살지 않는가. 아파트와 학교를 등진 성당 가는 보도는, 제법 길고 한적하여 걷기엔 안성맞춤이다. 봄엔 벚꽃에 취하고, 여름엔 녹음을 즐기며, 가을엔 낙엽과 속삭이고, 겨울엔 앙상한 가지 사이로 꿈을 꾼다. 굳이 시간 들여 야외에 나가지 않더라도, 자연을 숨 쉬고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곳이어서 좋다.
해마다 낙엽이 본격적으로 날리기 시작하면, 마음이 진한 아쉬움으로 물들곤 한다. 미화원이 낙엽을 자주 쓸어치우기에, 낙엽이별의식을 오래 만나고 느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다. 차도(車道) 등 사람생활에 불편을 주는 곳은 낙엽을 치우더라도, 성당 가는 보도처럼 한적한 곳은, 낙엽이 다 말라 부서질 때까지 그냥 두었다가 후일 치우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 삭막한 도시민들이 낙엽을 보고, 밟으며 걸을 수 있게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결심하며, 위로받고 치유하는 낙엽이별의식을 드리기도 할 테니까.
성당 가는 보도의 벚나무들은, 지금도 신성한 낙엽이별의식을 바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