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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올해도 열흘이 못 남았다. 설밑이다. 이달 초까지도 살아서 꽃피우던 까마중도 몇 차례의 강추위에 얼어 말라가고 있다. 자연의 섭리, 계절이 강제로 까마중의 생명을 걷어갔다. 해마다 설밑이면 `또 한해가 갔구나!`하고 파고드는 생각에, 세월과 가장 밀도 높게 서로 마주대하며 살아왔다.
웬일인지 올 설밑엔 까마득한 옛 생각이 떠오른다. 봄을 맞으며 군에서 제대하고, 한해를 고향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취업준비로 보내게 되었다. 때마침 어떤 인연으로 한 아가씨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펜팔이 된 것이다. 글 쓰는 취미를 가진 그녀의 편지는, 농사일과 취업준비란 부담을 가지고 지내는 내게 요새 유행말로 `사이다`였다.
그해 설밑이 되었다. 나는 `세모(歲暮)`란 서툰 시 한 수를 답장에 써 보냈다. 어찌해서 그리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공교롭게 그 시의 세 번째 연이, 올 설밑 내 마음과도 닮아 보인다, 어쩌면, 많은 이들의 설밑마음도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세모야/ 냉랭한 별빛 속에 이어지는/여로처럼/네 꿈과/네 삶이 남긴/자국은/숲 속 오솔길의/옛이야기 같이 남았는가?”
세월 곧, 시간이란 무엇일까. 나와 무관하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 앞에 서면, 실상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존재라는 것을 사람이라면 모두가 안다. 나란 실존은 만물과 함께 시간의 큰 수레에 실려 싫든, 좋든 어디론가 강제로 가고 있다는 사실. 설밑만 오면 덧없이 가는 세월이 더 진하게 사람의 가슴을 물들이는 것이다.
백과사전의 `시간`을 열람해본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 특수 및 동시상대성이론 등이 적혀있다.
또 철학과 종교들에서 말하는 시간의 개념들도 많고, 융의 동시성이론도 요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결론은 아직 `수수께끼`란다. 전문가들이 그럴 진데, 범부인 내게는 시간이론들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바람(風)같다.
왜 시간은 한 방향 즉,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만 가는 것일까. 사람의 마음대로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대로 젊어지기도 하고, 늙어지기도 하며, 태어나기 전에도 가보고, 먼 미래도 가볼 수 있는 세상.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은가….
타임머신이란 기계도 시간의 한 방향성 때문에 사람이 상상한 유토피아의 하나일 거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란 현존 앞에서 대립과 타협, 희망과 절망, 무관심과 기도를 번갈아 체험하면서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또 살아갈 것이다.
인간도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이 유한한 생명임을 아는 한, 시간이란 절대자 앞에서면 마음 비우지 않을 수 없다는 진실을 만나는 설밑….
시로 편지의 답장을 쓴지 강산이 몇 번 바뀐 세월이 흐른 설밑을 맞아, 내 마음 안 판도라의 상자에서 되살아 나온 시 `세모`….
지금 다시 보니 풋풋한 스무네 살 청년의 싱싱함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때도 요즈음 못지않은 청년취업난에 위축되어 살았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꿈꾸며 살고 싶어 네 번째 연과 마지막 연은 이렇게 맺고 있다.
아가씨는 그때 이 시를 어떻게 보았을까.
“세모야/만추의 황혼 속에 낙엽 져/소망하는 가지처럼/꿈꾸는 제야의 종소리/퍼지면/진홍 태양과 함께/찬란한 원단이/밝아오고야 말리니…. /자,/세모야/우리 함께 노래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