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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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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나!
설밑과 설 무렵에는 앙상한 가지와 함께 사는 행복이 있습니다. 낙엽수가 못 사는 지역이나 열대지방 또는, 남반구에 사는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행복일 것입니다.
앙상한 가지가 무에 그리 행복감을 주느냐고요. 그러게요.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요. 예전엔 앙상한 가지를 보면 상실감과 허무감이 온몸에 스며들곤 했었는데, 왜 그리 되었는지 꼭 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앙상한 가지와 함께 살며 한해를 보내고 맞이한 연륜이 깊어져 서로 길든 게 아닌가싶어요.
언제였던가요. 꿈 많던 고교시절 한해를, 우린 학생회 활동으로 함께 보냈었지요. 설밑에 헤어져, 삼 년만엔가 군에 가며 잠시 얼굴을 본 게 마지막이었잖아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설밑 거리의 앙상한 가지 아래에서, 까까머리시절과 세레나가 떠오른 건 웬 조화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무엇이기에 제멋대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고 가고 하는 걸까요.
사람의 마음도 나이가 드는지, 안 드는지 헷갈립니다. 시대와 세월이 탄환보다도 빠르다 싶을 땐 마음도 나이가 드는 것 같고, 앙상한 가지로 인해 옛날이 오늘 같을 땐 마음은 나이가 들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나이가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심사를 세레나도 헤아릴 테지요.
세레나.
앙상한 가지가 내겐 결코 작지도, 좁지도 않았습니다. 칼바람 막을 옷 모두 벗고 당당히 겨울을 이겨내는 앙상한 가지 사이로, 새봄 기다리는 가지의 눈 위로 하늘과 해와 달과 별, 산과 바다와 들과 강을 다 담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크기와 씀씀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을 세레나도 알리라 믿어요.
낙엽수는 가을이 오면 잎을 떨구어 겨울을 준비합니다. 어릴 때부터 무수히 보았기에, 나무에서 왜 낙엽이 져야하는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먼 길을 오고 말았지요. 머리가 희어져서야 낙엽과 앙상한 가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무 연구자들은, 물이 부족해지는 겨울에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낙엽이 진다고 합니다. 살기위해 오히려 버리는 지혜를 선택한 앙상한 가지….
두 주체가 서로 길들여지면, 상대방을 자기처럼 알고 느끼며 살게 되는 거죠.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사람과 사물사이도 같다 여깁니다. 앙상한 가지와 길들여지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아둔한 나는 겨울방학 때 산에서 땔나무를 하는 등, 앙상한 가지와 함께 숱하게 살아내면서도 그 가지에서 새봄을 느끼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그저 나무와 풀, 자연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남들 따라하며 지냈지요. 아직 잔설이 응달에 남은 이른 봄, 진달래 개나리가 피기 전부터, 동네 뒷도랑 가에 핀 버들강아지를 따 먹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놀았습니다. 동무로 놀면서도 버드나무가 목마르게 새봄을 기다리는 사실을 그땐 왜 느끼지 못한 걸까요.
세레나!
어찌하겠습니까. 머리에 서리가 내린 후에야 사람의 삶도 앙상한 가지의 삶과 다를 바 없어야 한다는 걸 알아채고, 길들여져 가니 말입니다. 이제라도 길들여지고 있으니 다행이라고요. 고맙습니다. 타령 같은 이 말을 받아주니까요. 동 서양의 여러 선각자, 성현들이 설파하거나 보여준 삶이, `사람도 앙상한 가지같이 한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면 누가 될까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가정과 가정 사이, 단체와 단체 사이, 지방과 지방사이, 정파와 정파사이, 나라와 나라사이도 앙상한 가지 같이 버릴 것 버리고, 새봄을 향해 서로 길들여지면 참 좋겠습니다.
설밑과 설 무렵엔, 앙상한 가지사이로 올 아지랑이새봄의 행복을 함께 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