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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우리 집 근교 모 마을회관 처마 밑에 추억 하나 달려 있다. 푸른 하늘 신나게 누비던 내 소년의 마음도 담긴 보금자리다. 오랜만이다. 참 반갑다. 언제 지었기에 저렇게 새 집일까. 계절이 지금쯤이면 다 자란 새 생명들이 하늘 향해 날개 짓을 신나게 시도하고 있을 때다. 한데, 웬일인지 주인공들이 안 보인다.
사발 모양으로 처마 밑에 붙어 있는 제비집. 날기만 한다면 언제 어떤 새도, 바로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천장엔 제비가 집을 틀며 튀긴 흙물자국이 선명하다. 한데, 문이 없다. 비단 제비집만이 아니다. 내가 본 새들의 집은 문이 없었다. 엉성한 비둘기집도, 예쁜 종달새둥지도, 입구만 있는 까치집도 문은 없었다. 대문도, 방문도, 창문도 없는 것이다.
문이 없어도 새들은 자연과 더불어 잘도 살아간다. 내가 만난 곤충들과 다른 동물들의 집도 문은 없었다. 왜 동물들은 집을 지으며 문을 낼 줄 모를까. 창조주는 원래 문이 없는 집에 생명들이 살도록 마련한 것일까. 사람은 문 없이 살 수 있을까. 원시인처럼 털이라도 많다면 몰라도, 현대인은 문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몸이 변화하는 환경에 지탱할 수 없으므로….
인간도 집을 짓기 전까지는 동굴에서 살았다고 배웠다. 처음에는 문을 만들 줄 몰랐다는 이야기다. 변하는 날씨에 대응하려 옷을 만들어 입었을 테다. 다음엔, 기후변화는 물론, 적에게서 생명을 보호하려 집을 짓고 문과 창을 달았으리라.
어릴 때 산골 작은 우리 동네 집들은 대문이 없었다. 어느 집 마당에 들어서면 각 방마다 하얀 문종이 발린 여닫이 출입 살문이 보였다. 방엔 작은 봉창 하나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살문은 짐승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약한 구조였다. 나무로 살을 짰으나 간단한 도구로 쉽게 부술 수 있는 문이다, 그러니 범죄자 방어는 불가능하다. 지금 생각하면 살문은 역설적으로 범죄 없는 마을의 증거물이었다 싶다. 아홉 집 우리 동네는 대문이 없어선지 마치 한 가족처럼 정답게 살았다. 잔치나 제사음식을 꼭 나누어 먹는 것은 기본이고 관혼상제나 농사일도 내 일처럼 함께하며 지냈다.
살기 위해 집을 짓고, 문과 창을 만들어 환경 변화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인간. 하지만, 그로인해 이웃과 자연과의 소통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리라.
진화를 다루는 학문에서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 하는 현생인간. 그가 추구하는 삶이 과연 동식물의 삶보다 썩 나은 것일까. `슬기나 지혜`로 번역되는 `사피엔스`가 다른 생명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특질이라면, 그는 왜 생명체들 중에 가장 잔인할까. 혹시 잔인성이 집에 문을 만들어 살면서 생긴 것은 아닐까. 집 문을 닫으며 마음도 함께 닫아버려, 심성이 점점 사악해져 간 것인가.
우리 생태계 생명들은 다른 생명이나 물질을 먹어야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살기 위해 타자를 죽이거나 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사회의 현실은 권력, 돈, 명예, 오락, 유희, 범죄 같은 것들을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취하는 일이 횡행하고 있다. 이 행태는 슬기로운 삶과는 상반된다. 죄악이며, 생존법칙을 거슬리는 일이다. 때문에, 인간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로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인간이 제대로 된 호모사피엔스라면 적어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미(美)적이어야 한다.
동물들이 생존영역싸움을 해도, 그것은 생태계의 생존법칙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인간처럼 환경을 파괴하고, 죄악을 저지를 줄은 모른다. 인간이 정말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면, 제비집처럼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을까. 자연과 동식물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 대해, 사회와 나라와 지구별에 대해 나도 열린 마음이고 싶다.
사람들이 마음 열린 집에서, 어우렁더우렁 사는 모습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