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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무척 덥다. 마른 장마철이어서 더 더운 기분이다. 마실 물을 페트병에 부어 주머니에 넣고 나선 등산길이다.
산 초입인데 벌써 얼굴에 땀이 난다.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었다. 길가 이암 틈새에 작은 명아주 몇 포기가 가물에 시들어가고 있다. 손수건으로 얼굴 땀을 훔치며 별 생각 없이 전처럼 걷는다. 평탄한 길로 접어들자 목이 말라왔다.
무조건반사 같은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시려 고개를 쳐들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뭉게구름 한 송이가 외롭게 떠 있다. 저 송이로 많은 구름이 몰려와, 빗님이 목마른 땅을 푹 적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물병을 입에 대었다. 그때, 조금 전 만났던 명아주가 떠올랐다. 비를 갈망하는 명아주의 이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 물이라도 나누어주었더라면 명아주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 물을 남겨 돌아오는 길에 꼭 나눠주자`고 마음먹으며 한 모금 마셨다. 한참동안 걸어가면서도 그 생각이 마음을 맴돌았다.
반환점에 도착했다. 운동기구가 있는 곳이다. 늘 하던 대로 거꾸로 매달리기 운동부터 하였다. 두 아주머니가 오더니 가까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운동을 마치고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다른 의자에 앉았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천도복숭아가 세 개인데, 아저씨 한개 드세요”하면서 가져다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받은 것을 먹기 시작했다. 말랑하게 익어 참 맛있다. 가까운 등산길이어서 물 이외에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하여 이 산에서 무얼 얻어먹는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기에 참 고마웠다. 먹는 사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머니는 산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먹을 것을 잘 나누지 않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나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천도복숭아를 다 먹었다. 새콤달콤한 뒷맛에 입이 개운하다. 복숭아물 묻은 손이 끈적대어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물병을 드는 순간, 아까 본 시들었던 명아주가 또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앉은 바로 앞에 가뭄에 시든 풀 한포기가 보였다. 속으로 감탄하며 손 씻은 물이 이운 풀에 가도록 하였다. 시든 잎이 물을 머금으며 금방 생글생글 웃는 것만 같았다. 고맙다고 온몸으로 인사를 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소중한 비밀을 알아챈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서 나아가 우주 안에서,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존재들 사이에는 언제나 이적(異蹟)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구나하는 자각(自覺)이 그것이다.
이어 이런 느낌들이 이어졌다. `아까 가뭄 타는 명아주 앞에서 내가 보낸 연민의 마음을 명아주가 느끼고, 명아주는 텔레파시로 아주머니 마음에 전달한 거야. 그 결과 나에게는 천도복숭아라는 선물을 가져다주면서, 또 다른 시들어가는 풀을 되살리게 했을거야. 때문에 명아주는 내가 돌아가는 시각에, 자기에게 물을 나누어 주리라는 사실을 느끼고 기다리고 있을 게야.`
어떤 이들은 텔레파시 곧, 정신감응(精神感應)현상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일이지, 사람과 동식물사이의 일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굳이 전문서적 내용을 들추지 않더라도, 간단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식물도 인간과 정신교감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돌아갈 때 갈증에 극도로 시달리는 명아주에게 남은 물을 꼭 주어야 한다. 명아주의 갈망을 저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명아주에게서 거짓 마음장이라는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손에 든 병에 조금 남은 물을 확인하며 일어선다. 길 가 이암 틈새에서 가물에 잔뜩 이운 채, 목말라 서있을 명아주의 모습이 다시 눈앞에 아른거린다.
발걸음이 빨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