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기/발표 글-경북매일

무인 건빵가판차량

보니별 2017. 9. 16. 20:12





오피니언칼럼

무인 건빵가판차량







등록일 2017.09.14           게재일 2017.09.15  




 ▲ 강길수<br /><br />수필가 
▲ 강길수 
 
수필가

유리알 향수(鄕愁) 한 봉지를 샀다.
 
이 길을 가끔 다니면서 건빵 파는 차를 보았었다. 화물칸 뒷문을 열고 파는 건빵을 쌓아둔 밴 가판(街販)차량이다. 좌회전하여 무심코 달리다가 건빵가판차량이 갑자기 보이면, 위치상 차 세우기가 어정쩡하여 지나치곤 했었다.
 
가판차량을 지날 때마다 옛 건빵 추억이 유리알처럼 향수를 자극했다. `다음엔 꼭 사야지!`하고 생각하며 달려가지만,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그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지나치며 건빵을 사지 못했다. 오늘은 다행히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건빵 생각이 나서 차를 멈추었다.
 
건강에도 좋다는 보리건빵이다. 나는 아예 비상식량이란 구실을 달아 큰 종이포대에 든 건빵을 사고 싶었다. 생산자, 생산일자, 원재료 등을 내가 확인하는 동안 주인 만나러 운전석 쪽으로 갔던 아내가,

“어, 이 차 사람이 없네요. 무인가판차량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아! 그래?”하고 대답하는 순간, 저절로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아내가 우선 작은 것 한 봉을 사 먹어보고, 또 사든지 하자고 해 그러기로 했다.

투명 비닐에 포장된 건빵 한 봉을 손에 들고 쳐다본다. 낱개는 옛날 건빵 보다 조금 작고 얇아 보였으나, 모양은 그대로다. 입에 군침이 돈다. 우리 차에 돌아와 얼른 건빵 한 개를 입에 넣었다. 바로 옛 맛이다. 입 안에서 `아삭!`하고 부서지는 건빵의 담백함을 타고, 마음은 이내 옛 까까머리 때로 뛰어갔다.

6·25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휴전된 후,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는 보릿고개를 해마다 넘으며 살았다. 산골 아이들에게 과자나 빵 같은 주전부리는 먼 꿈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건빵을 먹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며 자랐다. 한 해 한두 번에 그쳤지만, 건빵 주전부리하는 며칠간은 정말 행복한 나날이었다.  

삼촌 두 분이 6·25 참전용사로 군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촌들은 휴가 올 때 마다 건빵을 제법 여러 봉 선물로 가져왔다. 후일 내가 군에 입대한 뒤에야 안 일이지만, 그분들은 본인에게 지급되는 건빵을 조카들을 위해 아껴 모았다가 휴가 때 가져온 것이다. 그때는 누구나 군에 가면 마음대로 건빵을 먹으며 사는 줄 알았다.  

군에 입대해서 처음 건빵을 받았을 때도, 어릴 적 건빵추억이 떠올랐었다. 삼촌들이 비로소 고마웠다. 담배를 못 피우던 나는, 군에서 지급되는 화랑담배 대신 건빵을 받았다.

동료들보다 건빵이 많아 주로 신참병들과 늘 나누어 먹었다. 건빵 받은 신참병들은 봉지 안에 든 별사탕을 또 나와 나누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사탕은 고된 병영생활의 샛별이었다.

무인 건빵가판차량을 놓아둔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들판 한가운데나 다름없는 곳에서, 차량 무인가판을 할 마음을 어떻게 먹었을까. 소득과 지식수준이 높아졌지만, 아직도 불신이 깔린 우리사회다.

아내는 무인카메라라도 있을 거라 했지만, 추측일 뿐이다. 사람이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누가 건빵과 돈을 훔치기라도 한다면, 도둑을 찾기가 쉽지 않을 현실을 주인도 모를 리 없을 터. 그런데도 그는 무인 건빵가판차량을 가져다놓았다. 아마도 주인은, 우리사회를 굳게 믿었으리라. 믿음에 희망을 걸고, 믿음과 희망을 사랑이란 밭에 심고 가꾸어내며 사는 분이리라.

무인 건빵가판차량을 만난 것은, 나에겐 또 하나의 행운이다. 유리알 같은 건빵향수를 만난 기쁨에다 믿음, 희망, 사랑이란 사람의 세 덕(德)을 무인 건빵가판차량으로 묵묵히 실천하는 샛별이웃을 만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 마음에도 샛별이 내려앉은 기분이다.

며칠 후, 우리부부는 건빵 한 포대를 더 사서 아이들과 나누었다.

세상은 살펴보면 살만한 곳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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