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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남기는 법

보니별 2016. 12. 23. 02:56



오피니언칼럼
시간 남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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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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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길수<br /><br />수필가<br /><br /> 
▲ 강길수 
 
수필가 
 
 

칠년 전 사월 어느 날, 한 평생교육문화센터의 서실(書室) 문을 처음 들어섰었다.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그 중 하나로 붓글씨 쓰기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우연히 보게 된 광고지를 보고 그리하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두 시간씩이 연습시간이었다.
 
첫날은 `가로 직선 긋기 연습`을 했다. 선생님이 습자지(習字紙)에 쓴 붉은색 체본(體本)을 본 삼아 그었다. 다음 날은 `세로 직선 긋기`를 하였다. 이어 `한 일`자와 한글 `ㅣ`와 같은 형식의 선 긋기를 선생님이 인정할 때까지 이었다. 
 
더디어 숫자 등 쉬운 글자부터 쓰기 연습이 시작되었다. 해서체(楷書體)다. 중학교 땐가 잠시 `습자연습`을 해 본 게 전부인 나였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잘도 갔다. 약 다섯 달이 흐른 후에야, 나는 체본에 날짜와 글자의 뜻과 소리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훗날 혼자 연습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시작한 첫날의 연습지에는 그날 쓴 것인지, 후에 쓴 것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2009. 4. 16(木) 시작, 유네스코 포항 평생교육문화센터`라고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었다. 

직장 일을 할 때는 육하원칙에 따라 일을 빈틈없이 기록하고 처리한다고 평 받던 내가 정작 자기 일에는 왜 그렇게 어눌했던지 모르겠다. `다락 루(樓)`자가 있는 것은 `2009. 9. 29`로 날짜가 쓰여 있다. 또 `잠잠할 묵(默)` 자가 있는 것이 그 해 10월 15일 쓴 것이다. `이을 속(續)`자를 쓴 것이 같은 해 10월 27일의 연습지다. 글씨가 제법 늘었던지 선생님은 이 무렵부터 의례적 격려이겠지만, 내게 `잘 쓴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동료들도 `명필 나오겠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집에서 복습으로 써 본 것은 딱 한 번에 지나지 않았던 나다. 일주일에 두 번 쓰는 것으로 잘 쓴다는 소리를 들으니, 미안하기도 했으나 내심 기분도 좋았다. 보통, 한 체본에 서너 장씩 쓰고 넘어갔다. 선생님의 글자를 닮아 가는지 나로서는 잘 몰랐다. 

같은 무렵, 한 어린이집에서 한자를 한 학기 가르친 일이 있다.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서 받은 학 모양의 편지가 정겹고 재미있었다. 고마워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내친김에 내 붓글씨 사진도 남기기로 하고, 장롱에다 쓴 습자지들을 세로로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쓴 일자별로 습자지를 찾아 펴고 붙여, 사진 찍는 작업은 시간이 꽤나 걸리는 성가신 작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나간 삶의 모습을 남긴다는 기쁨도 있었다. 한 사진을 찍는 순간, 이런 깨달음이 문득 들었다.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에겐 흘러가지만 무엇이건 하는 사람에겐 남는 법이다!` 하고.

세월이 제법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의 일 중 대부분은 시간을 남기는 활동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활동의 전 분야에서 기록과 제작, 창작, 보관 등 시간 남기는 일은 유사 이래 계속되어 온다. 가정, 직장, 공공기관, 박물관, 도서관, 전시장, 공연장, 연구소 등 사람이 살고 일하며 쓰는 공간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시간 남기는 것들이다. 시간은 보이거나 들리지 않게 예외 없이 흐르지만, 지성(知性)으로 사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이거나 들리는 대상물로 변화시켜 남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아닐까. 그리고 역사는 무엇이건 하는 사람 곧, 시간 남기는 법을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 간다고 믿어진다.  

나는 생각했다. 사람은 시간을 남기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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