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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한가위 연휴 하루 전. 마침 쉬는 날이라 양학산에 올랐다. 저 아래 보이는 7번 국도엔 차량들이 한가위 꿈을 싣고 꼬리 물고 달린다.
하늘엔 아직 철 이른 메밀잠자리들이 한가위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하다. 멀리 형산강 너머 보이는 제철소. 내 눈부신 계절이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곳.
발걸음도 가볍게 늘 가던 코스를 걸어 반환점 부근에 갔을
때다. 십년 전쯤, 새 길을 내기 위해 산자락을 절개한 비탈에 당국에서 소나무 묘목을 심었었다. 남향을 향해 있어 햇빛을 많이 받는 절개지여서,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심은 어린소나무가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한데, 그 소나무들이 이젠 많이 커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란 것이
대부분이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
서쪽 가장자리 쪽엔, 심지도 않은 아카시아나무가 솟아 나 함께 자라고 있다. 인근에서
뿌리로 뻗어왔는지, 씨앗이 떨어져 움텄는지 모르겠다. 아카시아나무는 소나무보다 훨씬 더 크다. 능선위에서 시가지 모습과 한창 자라나는 소나무와
아카시아나무 등을 살피다가, 얼핏 눈에 익은 것이 스쳐 지난 것 같아 다시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웬일일까? 활짝 핀 아카시아 꽃 일곱 개를
단 꽃송이 하나가 보이는 게 아닌가. 장미라든가 진달래, 개나리 등이 다른 계절에 핀 경우는 많이 보았어도, 구월에 핀 아카시아 꽃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어린 시절 봄날, 들에서 소꼴을 망태에 뜯어 담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서던 우리 집 대문간. 그 옆에 함께 사는 커다란
아카시아나무 꽃이 온 사방으로 내뿜던 진한 향기. 지금도 눈만 감으면, 코 속 후각세포에 고스란히 간직된 향. 우리나라 벌꿀의 7할을 차지한다는
아카시아 꽃 꿀. 목재는 고급가구 재료로 없어서 못 쓴다는 아카시아나무. 북미가 원산지이지만, 구한말 일본무역회사 사람이 처음 심어, 일제가
우리 산을 망치려고 심었다는 오해도 받은 아카시아나무. 옛적에 군불나무로 많이 때며 손을 찔려 미워도 했던 무서운 가시 달린
아카시아나무….
제철 아닌 구월 열사흘에 만난 아카시아꽃. 꽃을 보는
순간, 지구 온난화로 알래스카의 만년설이 한해 수십 미터씩 산 아래부터 위로 녹아내린다는 얼마 전 뉴스가 뇌리를 스쳤다. 시베리아 영구 동토가
녹아, 땅 속 메탄가스가 방출되며 온난화를 가속한단다. 이 산에도 전에 보이던 이름 모르는 산꽃들이 안 보이는 것이 적지 않다. 기후 변화가,
시대의 변동이 확 피부에 와 닿는다.
휴대폰을 꺼내 아카시아꽃 사진 세 장을 찍었다. 사진을 확대해보니, 한 송이에 꽃 일곱 개가
피었다. 봄에 피는 것은 한 송이에 꽃 이삼십 개가 달린다. 구월에 만난 꽃 일곱 개 핀 하얀 아카시아꽃송이라니. 이 아카시아나무는 왜 가을에
꽃 한 송이를 피워냈을까. 변해가는 환경에 나처럼 헷갈리는 걸까.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대의 징표와 메시지로 피어난 것일까.
자연도, 지구 어머니도 변해가는 현장을 구월에 핀 아카시아 꽃을 통해 또다시
생생하게 만났다. 사람도 자연 속의 일원인 이상, 내가 모르는 변화를 하고 있을게 틀림없다. 지난 밤, 이웃 경주에서 우리나라 관측사상 가장
강한 진도 5.8의 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느끼기엔 70년대 중반인가, 총각시절 해도동 하숙집에서 저녁을 먹고 동료들과 잠시 담소하던 중
발생했던 지진과 비슷했다. 기후변화와 늘어나는 천재지변. 생물들의 변화와 멸종. 갈수록 폭력성의 가속페달을 더 세게 밟아대는 어리석은 인간
공동운명체….
나는, 우리가족과 우리나라, 또 우리지구촌은 어떻게 이
변화의 물결을 헤쳐나아가야 할까. 그래도 오늘, 스피노자의 사과나무를 나부터 심어야 하는가.
일곱 아카시아꽃아, 너는 대답을 알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