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기/수필 누리

별 오두막

보니별 2019. 6. 10. 23:26

                                   


                                                                         별 오두막

 

                                                                                                        강길수姜吉壽

                                                         

   작은 덩굴풀이 별을 품었다. 보석 알갱이를 흩뿌린 듯 반짝이는 별들이다. 이른 봄날 대낮, 가장 낮은 곳에 내려앉은 앙증스러운 별들을 만나다니 행운이다. 별들 앞에 앉았다. 가로수 보호대 틈새를 개선장군으로 비집고 올라와, 봄노래 부르는 풀을 살펴본다. 덩굴 끝 꽃자루마다 작디작은 하얀 별들이 깜찍스레 반짝인다. 깨알만한 꽃잎들이 모여 별이 되었다. 선인들은 참 지혜로웠나 보다. 몸 낮추어 아주 작게 핀 꽃을 별꽃으로 높여 불렀으니 말이다.

   땅에 바짝 붙어사는데도, 줄기가 다른 꽃에 비해 튼실하다. 낮게 살아 위험이 더 큰 때문일까. 실한 여러 줄기 끝에 핀 꽃들이기에, 서로 질긴 연()으로 이어져 보인다. 꽃말이 추억이어서 그럴까. 추억이 마음을 조른다. 단박에 마음은 그 옛날 우리 과수원으로 날아간다. 수십 년 세월을 단숨에 거슬러 오두막 앞에 섰다. 여름밤, 이슥한 시간이다. 오두막은 과수원 중간쯤 길옆에 자리한다. 원두막으로 쓸 요량으로 흙벽돌로 지은 군불아궁이 한 칸, 작은 방 한 칸이 전부인 조그만 집이다.

   군에서 제대하고 첫 직장에 갈 때까지, 약 한해를 고향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보냈다. 그해 여름과 가을을, 과수원 오두막 외딴 방에서 총각 혼자 밤을 지냈다. 임시거처로 꾸미는 바람에 성글기 짝이 없었다. 출입문은 집 처마 밑에 잠자던 헌 창호지 여닫이문을 가져다 대충 붙이고, 남쪽으로 난 봉창 문은 아예 달지 않았다. 방바닥은 쓰고 남은 비닐장판을 깔고, 벽은 틈새만 메워 커다란 흙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머리맡 왼쪽엔 얇은 이불과 베개가 하나씩, 그 위로 대못에 걸린 허름한 모기장 하나가 있었다. 오른쪽엔 남포등 하나, 그 앞에 책 몇 권 놓인 게 전부였다.

   낮에 농사일을 거들고 나면 피곤했다. 하지만, 저녁 먹고 오두막으로 오면, 별들이 힘을 보내는지 피로가 쉬 가셨다. 과수원을 지킨다는 명목이었지만, 알퐁스 도데의 <>을 좋아했던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별과 밤 생물들을 가까이 만나보려 했다. 등피가 반쯤 그을린 남포등에 불을 붙였다. 가슴에 베개를 받치고 엎드려 잡지나 교양서적 또는, 취업준비 책을 건성건성 보며 밤 시간을 보냈다. 눌린 가슴이 답답해지면 밖에 나갔다. 가지에 별을 덩달아 매단 사과나무 사이를 걷거나, 아무도 없는 오두막 윗길을 산보했다. 하늘에서 반짝이 손짓으로 사람을 부르는 별과, 밤의 서기(瑞氣), 밤 생물들의 소리와 생기 같은 존재들을 오롯이 만나는 시간이었다.

   아주 가끔, 이웃 동네 총각 처녀들이 함께 놀며 먹을 자두나 능금을 사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가씨들은 남포등 불빛으로 비치는 내 성글은 처소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지만, 과일 이야기 외에 별다른 질문이나 말을 걸진 않았다. 대부분의 밤은 혼자서 밤하늘의 별과 달, 느껴오는 온갖 생물들이 내는 소리와 그 오라(aura)를 벗하며 보냈다. 만일 그때 그립던 아가씨라도 곁에 있었다면, 성글은 오두막은 도데의 별 오두막과 흡사한 과수원 별 오두막이 되지 않았을까.

   여름밤, 잠자는 사과나무 사이에 작은 별똥별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웬일로 오두막 앞을 서성대며 반짝반짝, 파르스름한 꿈을 뿌렸다. 오두막과 과수원은 졸지에 꿈나라로 변신했다. 꿈나라도 잠시, 요정처럼 가뭇없이 별똥별은 떠나갔다. 그제야 나는 반딧불임을 알아챘다. 시나브로 여름이 가고, 마시는 숨이 폐부를 관통할 듯 상쾌한 가을이 왔다. 이슬 내리는 가을밤 과수원을 걷노라 치면, 보석 맑은 별들이 와르르 가슴으로 빨려 들고 말았다. 저절로 마음이 ! 살아있음의 기쁨이여하고 외쳤다.

   별과 나, 별과 너, 별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으로 연결된 것이 아닐까. 어떤 이는 만유인력으로 별들이 우리와 연결되었다고 한다. 맞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원적(本源的)인 무엇이, 별과 우리 사이에 있다는 진한 느낌은 무엇일까. 별꽃이 뿌리와 줄기와 되알지게 이어졌기에 꽃 피워 별을 데려왔듯, 그런 연()이 있다 싶다.

   외계인 채널러들이 말하듯, 사람의 본향(本鄕)은 정말 별일까. 화성 등 행성들에 우주선을 보내, 생명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구도자적 열정을 보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날 과수원 별 오두막에서 별들과 교감을 나누며 느꼈던 신비한 끌림이라든가, 별 추억을 단박에 불러낸 저 작은 별꽃의 힘도, 그 본향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닐까.

   별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터다. 신화들도, 종교 설화들도 별과 연관된 것이 많다. 심층 심리학자나 천문학자의 연구결과들을 들지 않더라도, 별은 분명 사람과 뗄 수 없는 사이란 믿음이 든다. 사람도 지구별 주민으로 살지 않은가. 맞다. 나도, 너도, 우리도, 지구도, 우주도 별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래. 별을 보면 과수원 별 오두막을 떠올리자. 내 마음을 별빛에 실어 보낼 수 있고, 별빛에 실려 오는 미지의 마음도 받아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늘 밤은, 별이 유난히 반짝인다.




            - <에세이 21> 2019. 여름호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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