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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수필가 |
텅 빈 들녘이 사람을 오라 한다. 북극에서 내려오는 된바람 기꺼이 품으며 사람을 오라 손짓한다. 아직 회수되지 못한 볏짚두루마리들만이 하얗게 혹은, 푸르게 동그마니 서서 들녘을 지켜보고 있다. 된바람의 냉기가 두루마리를 에워싼다. 저 두루마리마저 떠나고 나면, 들녘은 망망대해보다 더 절박하게 텅 비리라.
두루마리에 갇힌 볏짚은 어떤 생각을 할까. 지난 한 생 푸지게 살아 풍년을 이루어 냈으니, 이제 어디로 가 무엇이 된들 대수이랴 할까. 내 분신 쌀이 사람과 동물을 먹여 살리니, 그것으로 족하다 할까. 알곡 벼 다 털리고 몸뚱이마저 사료로 쓰이려 이리 둘둘 말려 세워졌으니, 사람은 참 욕심쟁이라고 원망하며 욕할까. 어차피 사람이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둬들였는데, 케 세라 세라나 부르지 무슨 상관이야라고 할까.
하늬바람이 된바람에 밀리어 떠나며, 초겨울 이별의 노래를 부른다.
“지난 한가을, 푸진 오곡백과 다 멀리하고 하늬바람 떠나간다네.
흩날리는 낙엽 지르밟고, 앙상한 가지사이 비집고 떠나간다네….”
하늬바람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저 남산 골짜기에 숨을까. 남산너머 양지바른 언덕에 쉴까. 언덕아래 넓은 들판에 퍼질까. 거긴들 된바람이 안 따라 갈까. 그래. 남으로, 남으로 더 가야해. 따사한 마파람이 맞아줄 남쪽나라로 가야 돼. 그 곳까지 설마 된바람이 따라오지 못할 테니까.
하늬바람마저 떠나고 나면, 들녘은 바야흐로 자신을 온전히 비우리라. 일찍 벤 벼 포기에 파릇파릇 돋아나, 늦가을 들녘을 생기(生氣)로 비추던 벼 싹도 칼바람의 서슬에 산화(散華)되리라. 월동하는 생물들도 땅 속에서 혹은, 제 집에서 겨울잠에 빠지리라. 들녘은 자신을 텅 비웠기에, 그 비움이 가득 찬 모습으로 화(化)할 것이다. 그리고 하얀 눈을 기다리리라. 이윽고 밤새 눈이 소록소록 들녘을 채우고 나면, 비로소 비움이 가득 찬 새하얀 새아침 들녘을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사람이 자연에서 텅 비었기에 오히려, 가득 찬 기막힌 모습을 찾을 수 있음은 행복이다. 사람이 바다가 그리워 찾는다든가, 하늘을 동경하여 쳐다보고, 산봉우리에 즐겨 오르는 모습은 무엇을 말해줄까. 바로 텅 빈 세상을 보기 위함이 아닐까.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마음을 원래 가지고 태어난 존재가 사람이리라.
온 나라가 욕심으로 가득 차 보인다. 나와 너, 내편과 네 편, 내 고장과 네 고장, 젊은이와 늙은이, 근로자와 사용자, 남자와 여자, 또 무엇, 무엇으로 나뉘어 자기편의 욕심만 부리고 있다싶다. 국가사회에 비전을 제시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 곧, 경제성장과 국가안보를 통해 나라를 통합해야할 책무가 집권정부에게 주어졌다고 본다. 그런데 침묵해온 서민인 내 눈에 보인 정부여당이 해온 일은, 그들만의 편향된 시각으로 서민이 보는 사회저변의 진짜적폐는 그냥 두었다. 반면, 정치적 반대세력 제거로 보이는 적폐청산과, 안보상 매우 우려스런 남북관계 수립이란 욕심으로 가득 차 보인다. 생활고와 안보불안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절규를 받아들일 마음공간이 없다싶다. 대통령이 나라를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지 몰라,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고 불안하다. 서민들은 불안에서 해방되고 싶다.
아무리 정치가 다수승리원리로 작동된다 해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에겐 천부적 지각능력 곧, 직관적 느낌이 있다. 권력층의 행태를 국민들은 알게모르게 느끼게 마련이다. 침묵하는 국민들이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사는지 살피고 돌보는 게 바른 정치 즉, 경세제민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하여 사람은 특히, 정치인은 겸손할 필요가 있다. 겸손은 바로 텅 빈 들녘과 같은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는 텅 빈 들녘이다. 텅 빈 들녘엔 무엇이든 심을 수 있듯, 모든 것을 올려놓고 의논하고, 타협하고, 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닐까. 텅 빈 초겨울 들녘은 우리사회에 요구하고 있다. 모두가 마음을 비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