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낙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초겨울까지만 하더라도 보도(步道)를 메우던 낙엽들이 자취를 감췄다. 보도 옆 학교 운동장 가에 플라타너스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다. 가지에는 마른 잎과 열매가 간간이 붙어있다.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건가. 초겨울까지 푸른 잎을 놓지 않고 버티던 플라타너스나무다. 대한(大寒) 무렵의 한겨울인데도, 가지와 마른 잎은 서로 부둥켜안고 아직도 긴 이별연습을 하고 있다니.
반면, 간선도로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는 완벽한 나신(裸身)으로 변모해 있다. 마른 잎을 한 개라도 달고 있나 싶어, 여러 나무를 유심히 살펴도 단 하나도 없다. 은행나무와 잎 사이의 맺고, 끊음이 저리도 분명한 걸 이제야 알았다. 나무밑동 곁 마른 잔디를, 마른 은행낙엽 몇 잎이 부여잡고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도 나누는 걸까. 지난봄의 약동과 여름의 성숙과 가을의 화려함은 찾아 볼 수 없어도, 마른 낙엽과 잔디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고도 애달프다.
가을이 되자 나뭇잎들은 스스로 고운 색옷 갈아입고 가지를 떠나 은퇴했을 터다. 북녘 된바람에 우수수 쓸려 낮은 곳에 모였을 낙엽들. 미화원이 큰 비닐봉지에 쓸어 담아, 매립지나 소각시설로 보냈을 것이다. 매립지에 간 낙엽들은 땅 속 깊이 묻혀 시나브로 부패되며 가스와 물, 흙으로 되돌아 갈 길을 걷겠지. 소각시설로 간 낙엽들은 커다란 소각로에 들어가 몸을 불태워 열과 가스와 증기로 변하고, 얼마간의 재를 남기는 길을 갔을 테고. 도시 가로수에서 태어난 나뭇잎들의 한 생은 이런 여정들을 겪어내며 마칠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중년기에 접어들자, 주위에서 ‘오비(OB)’란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직장 떠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도 별 생각 없이 그 말을 따라 썼다. 그때 글쓰기라도 했었더라면, 오비의 원어를 따져 보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남 따라 막연히 그냥 썼다. 훗날, 원어도 모르고 따라 쓰는 자신이 부끄러워 온라인 사전을 찾아보았다. 영어로 ‘올드 보이(Old Boy)’였다. 직역하면 ‘늙은 소년’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이 ‘졸업생’이나 ‘퇴직자’를 뜻하는 표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두 번째 직장에서 설립한 작은 회사에, 사측의 권유로 기술진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무렵, 두 번째 직장의 ‘오비모임’이 결성되었다. 나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새 직장에서는 현직이었지만, 전 직장기준으로 보면 오비였다. 매월 한 번씩 열리는 오비모임을 회원들은 좋아했다. 타 모임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이루어져서다. 이를테면 경쟁심리가 없어 흉허물이 없다든가, 젊음을 함께 바친 직장이었다는 공감대가 펼쳐졌다. 따져 보니 내가 참여하는 오비모임도 퇴직자모임, 동문회, 성당의 봉사직출신모임 등 여러 개다.
생각해보면, 활엽수 나뭇잎들은 가을에 모두 오비가 되었지 싶다. 어떤 잎은 붉은 오비, 어느 잎은 노란 오비, 다른 잎은 보랏빛 오비, 여느 잎은 갈색 오비가 되어 직장인 나무를 떠난 것이다.
한겨울에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은행나무는, 나무와 잎 사이가 사리 분명하나 정 없어 보인다. 아직도 마른 잎과 열매를 더러 매달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와 잎, 열매 사이는 끈끈하고 긴 이별을 나누어 애석하나 아둔해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오비가 되는 여정도 활엽수 나뭇잎들과 같지 않을까. 어떤 직장은 퇴직 문제가 은행나무낙엽처럼 말끔히 처리된다. 직장도, 근로자도 합법적 퇴직문제를 이견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리라. 다른 직장은 퇴직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고 플라타너스나무 잎처럼 끈끈하게 끌어, 법정싸움까지 비화되기도 한다. 양측의 욕심 때문인가.
지금 오비이면서 현직이기도 한 나는, 장차 어느 나무를 닮아가야 할까. 또, 지구촌 생이 끝나는 날엔 어떤 오비가 기다릴까.
오비
등록일 2019.01.24 19:55 게재일 2019.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