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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마르첼리노!
늦가을 아침 길. 인도(人道)가 낙엽들의 만남으로 넘쳐난다. 노란 만남, 빨간 만남, 갈색 만남, 보랏빛 만남, 푸르스름한 만남도 있다. 도로 가에 줄지어 사는 가로수들에서 태어나 살던 나뭇잎들. 때가 차자, 홀연히 나무를 떠나 이리저리 흩날리며 가을의 만남 길을 시작하고 있다. 낙엽들을 바라보고 밟기도 하며 걸어가는 내 마음 거울에 수많은 만남이 아롱져 비친다.
올 늦가을, 이 거리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낙엽이 압권이다. 예전에 비해 색깔이 너무나 샛노랗고, 수량도 많다. 남쪽하늘에 낮게 뜬 아침 해가 가로수 가지 사이로 비집고 나와 웃고 있다. 따사롭게 볼을 쓰다듬는 햇살이 꼭 어린 날 엄마의 약손이다. 은행나무 가지와 작별한 잎이 가을노랑나비로 보인다. 팔랑팔랑 날아 새로운 곳 찾아 나선다. 어떤 나비는 잔디밭에, 어떤 나비는 보도블록위에, 어떤 나비는 운동장에, 또 어떤 나비는 차들 쌩쌩 다니는 차도에 내려앉는다.
마르첼리노.
은행나무 가족으로 한생을 마친 가을노랑나비들. 그들은 새 만남의식을 치르려 길을 떠난 게 아닐까. 지난 삶 내력 따라 연노랑, 짙은 노랑, 황록색 등으로 몸 단장한 나비들. 높하늬바람 타고 날아와 새 만남의식을 준비한다. 이제, 나비들은 모든 것을 타자(他者)에 의지할 운명이다. 생명을 반납했기 때문이다. 바람이나 중력 혹은, 사람 손이나 다른 힘에 제 몸을 기꺼이 맡겨야 하는 것이다. 잔디밭에 내려앉은 샛노란 가을나비 하나. 명을 다하고 말라가는 잔디들과 인사하고 어우러지며 지난 한 생을 지워낼 의식을 시작한다. 건물사이를 비집고 여전히 웃고 있는 늦가을 아침 해님이 머리에 손 얹어 축복한다.
저 가을노랑나비는 머지않아, 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 비를 온 몸으로 받아들일 터. 촉촉하게 젖은 날개는 토양 미생물에게 제 몸을 먹이로 바칠 것이다. 미생물은 나비의 몸을 탐하듯 분해하며 먹이와 퇴비 곧, 나무와 잔디의 영양소로 만들 것이다. 봄에 새 잎으로 태어나 여름과 가을을 살면서 열심히 일했던 가을노랑나비. 소임을 마치고 스스로 가지를 떠나 한 생을 마감한다. 가을노랑나비의 새 만남의식은 이렇게 시나브로 완성되는 것이다.
마르첼리노.
우리에게, 인간에게 아니, 만물에게 만남은 왜 있는 것일까. 헤어졌으므로 만난다는 말인가. 만물이 저마다 존재하고 자연 질서와 우주 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이상,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피할 수도, 따져볼 필요도 없는 사실이라고 너는 말할 테지. 또, 답도 없을 무익한 생각을 왜 하느냐고 따질 것이고…. 맞아. 네 생각이 현실적이지. 하지만 말이야.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사는 존재인데, 경험적 자연 질서라고 아무 생각이나 느낌도 없이 받아들이며 산다면, 그게 과연 인간일까’ 하는 마음이 떠날 줄을 모르니 어떡하겠나.
괜한 감상주의에 빠지지 말라던 네 말이, 이 늦가을 아침 흩날리는 가을노랑나비들의 날개짓 따라 함께 피어오른다. 가을바람이 자기를 어디로 데려가든 가을노랑나비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새로운 만남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제 몸이 분해되어 미생물 몸으로, 원소로, 퇴비로, 혹은 새 나무나 잎, 잔디가 되어도 개의치 않는다. 저 굳셈은 무엇을 말해줄까.
마르첼리노!
한줄기 센 높하늬바람이 노란 은행나무를 훑고 지나간다. 우수수 가을노랑나비들이 날아오른다. 곁에서 난데없이 ‘우두둑’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려본다. 날아오르다 힘 빠진 가을노랑나비들이 세워둔 승용차의 등에 착륙하는 소리다. 저 차는 떠나리라. 하면, 차 등에 올라탄 가을노랑나비들의 운명은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다시 분다. 싸늘한 늦가을 높하늬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