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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 수필가 |
손주 녀석의 행동이 갑자기 이상하다. 태어난 지 열다섯 달 된 유아다. 큰방에서 한잠 자고나서 이것저것 분탕 치며 잘 놀았다. 이를테면, 할머니의 묵주를 두 개씩이나 목에 스스로 걸었다 벗었다 하며 논다든가, 제 용품이 들어있어 제법 무거운 작은 아기배낭을 등에 메고 안방, 마루, 건넌방, 주방을 종횡무진 오가며 신난다든가,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다 집어 난장판을 만들며 잘도 놀았다.
한데 해질 무렵이 되자 별안간 한손에 차키를 들고, 다른 손으로 제 아빠 가방을 끌며 “아빠, 아빠 ~~” 라고 말하며 아빠에게 가져가는 게 아닌가. 또, 벗어놓은 아빠의 옷도 끌어다 주며 역시 급한 목소리로 “아빠, 아빠 ~~” 하며 무언가 보챈다. 나는 휴대폰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녀석이 아빠 옷을 가져다 아빠 손에 쥐어 주었는데 아빠가 바닥에 놓자, 기어코 녀석은 다시 끌어다 아빠 손에 쥐어주었다. 아빠는 의아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웃으며 “현민이가 집에 가잔다!….”하고 저절로 말했다. 그리고 ‘저 어린 것이 어찌 제 집에 가자할까?’라고 의문이 들었다. 저녁에 집에 다니러 온 둘째아들 부부에게 낮에 찍은 조카 동영상을 보여주었더니, 둘 다 웃으며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생후 일곱 달 되었을 무렵에도 이모 집에서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집에 가자고 심하게 우는 바람에 제 아빠가 세 시에 데리러 간 적도 있다했다. 그렇다면 손주 녀석은 이번에도 집에 가자고 아빠를 종용한 거라는 내 느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인 손주 녀석이 어찌하여 자기 집에 돌아가자는 의사를 표시할까. 제 할머니와 나는, 한 주간에 한번정도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선지 낯가림 하지 않는다. 또, 모르는 이들에 대해서도 심한 낯가림이 없는 아이다. 그런데 해가 기우는 시간이 되자 스스로 집에 가자고 아빠에게 보챈 것이다.
사람에겐 원래 ‘귀소(歸巢)본능’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손주는 난지 칠팔 개월 때부터 제 집에 가자고 울었고, 오늘은 자기 아빠의 소지품들을 챙기며 집에 돌아가자고 조른단 말인가. 아직 어리기에 대부분 본능이나 본성에 따라 반응할 손주 녀석이 이런 행동들을 보인 것은 사람의 본성에 귀소본능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게 아닐까. 사람뿐 아니라 비둘기, 연어 등 다른 생명체들도 귀소성이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아메바도 몸에 생체자석(生體磁石)을 가지고, 남극과 북극을 오간다는 사실을 연구자들이 알아냈다한다.
타향살이 하는 사람들은 향수(鄕愁)를 가지고 산다. 나도 그렇다. 중학교 이학년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오랜 타향살이를 하고 있어도 여전히 향수를 간직하고 산다. 한 해 대여섯 차례 고향에 간다. 그래도 떠나면 또 고향이 그리운 게 향수 때문이리라. 오래 전에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다. 하지만 고향이 있다는 사실이 그냥 좋다. 향수를 다룬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작품들도 많다. 향수는 사람의 귀소성향(歸巢性向) 곧, 귀소본능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사람의 귀소본능은 왜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고, 그 끝은 무엇일까. 시인 천상병은 ‘소풍’ 같은 세상 삶을 마치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했다. 사람의 귀소본능은 단순히 세상 집에 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자각을 노래한 것이리라. 맞다. 인생길은 보이는 집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집으로 가는 여로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집에 살면서도 종교에 귀의하고, 학문에 매진하며, 예술에 심취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사람과 생명체들이 타고난 귀소본능은, 결국 단순히 둥지나 집에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그 삶을 통해 본래의 삶 곧, 유전자에 각인된 참 삶의 집을 찾아 가는 눈으로 주어진 것이라 믿어진다.
다시 휴대폰 동영상을 켠다. 손주 녀석은 등에 제 작은 푸른 배낭을 메고, 아빠의 옷이랑 가방을 끌어다 주며 “아빠, 아빠~~”하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보챈다. 녀석의 귀여운 모습 뒤로, 아름다운 또 하나의 집이 오버랩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