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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수수필가 |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스스로 작성하여 보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증거물이, 비수로 변신하여 망막을 통해 심장에 파고들었다.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이, 머릿속이 하얀 진공상태가 되었다. 틀린 사실을 알려준 대표에게 변명도, 사과도, 그 무엇도 할 수 없어 그냥 멍하게 있었다.
“사과할 일 만들고 말았네….”
잠시 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뱉은 말이다. 미안한 마음을 이렇게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눈길이 컴퓨터 모니터로 다시 갔다. 보낸 메일을 열어놓은 화면이다. 찬찬히 뜯어보았다. 분명히 두 군데 틀린 곳이 있다. 두 항목인 단가는 고쳤고, 그 합계 항목은 숫자 두 개 중 하나만 바꾸고 그대로 두었다. 고치다 만 것이다. 따라서 두 단가를 합한 금액이 틀렸다. 한데, 하단의 총합계 금액은 맞게 고쳐져 있다. 또, 머리 부분의 총 견적금액에서 괄호 안 아라비아 숫자는 수정하고, 밖 한글표시 금액은 고치지 않아 그전 금액이 적혀있다. 엉망이다.
젊은 날, 취업하자마자 대기업 실험실에서 분석원(分析員)으로 일했다. 실험분석 절차는 간단한 것에서부터, 수십 단계를 거쳐야 되는 것들까지 다양했다. 여러 조작(操作)단계를 거치는 실험분석에서는 하나만 실수를 하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는 경우도 가끔 생겼다. 분석자가 자기 실수를 모르고 진행하면, 데이터가 안 나오거나 틀린 것이 나온다. 때문에 실험 시에는 착오나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다. 주어진 일에 집중과 선택이 강요되는 긴장의 세월이었다.
진급을 하며 실험데이터를 적용한 보고서나 정기적 통계작성 보고, 불합격품 처리방안 협의, 연구같은 품질관리업무가 주가 되었다. 이때, 피디씨에이 사이클(PDCA Cycle) 곧, 관리 사이클은 업무수행의 금과옥조(金科玉條)였다. 계획(Plan), 실행(Do), 점검(Check), 조처(Action)가 그 것이다. 새 제품이나 공정간 혹은, 출하된 제품에서 발생된 품질문제에 대해 생산 또는 개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결과를 점검하고, 발견된 문제에 대해 조처를 취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런 일들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점점 실수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그런데, 보낸 한 면의 견적에서 두 군데나 틀렸으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다. 품질관리업무를 떠난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애초 빈 양식을 썼거나, 관리 사이클의 ‘점검’만 제대로 했더라도 이런 실수는 범하지 않았을 터다. 좀 편하게 하려고 다른 곳에 썼던 견적을 모니터에 올리고, 내용만 고치다가 이런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한 달 가까이 지나선지,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 봐도 문서 작성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낼 시간에 쫓겼던지, 작업 중 전화 등 급한 일이 생겼었는지, 너무 더운 날씨에 더위를 먹었던지, 아니면, 노화현상이 나타 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원숭이가 제 잔꾀에 넘어간 격이 되었다.
구차한 자기합리화를 위한 추론이, 스무고개의 답처럼 차례로 마음에 피어올랐다. ㉠견적작성 중에 급한 일이 생긴다. ㉡작성 중인 견적서를 임시저장 한다. ㉢급한 일을 처리한다. ㉣임시저장된 견적서를 완료된 것으로 착각한다. ㉤견적내용을 확인 않고 메일로 보낸다. ㉥잊는다. ‘그럼, 그랬을 거야. 사람이기에, 오래 안 쓴 관리 사이클을 잊고 지낸 거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은 애써 자기위안을 삼고 있었다.
다행히 견적 낸 일을 맡게 되어, 발주처의 담당자를 만났다. 오류 있는 견적 제출에 대해 사과했다. 담당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처음 견적을 받았을 때, 잘못된 견적을 다시 내달라고 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관청에 공문을 내어 잘못된 부분을 수정한 경험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의 품의(稟議)나 결재제도는, 결함을 없애기 위한 중복점검 성격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잔꾀에 넘어진 견적오류 사건을, 자기정화능력 향상의 계기로 삼아야겠다.